[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匿名'을 '익명'으로 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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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문이 잘못 보도된 기사를 정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요즘엔 신문마다 기사의 잘못을 고치는 고정란이 있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그런 고정란조차도 인색한 것으로 비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의 관례가 정정보도를 크게 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사에 대한 법률적인 판단이나 판결에 따라 정정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신문이 자발적으로 정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신문이 남의 잘못을 크게 쓰면서 자기 잘못을 감추거나 마지못해 정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기모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야흐로 시대의 흐름이나 독자의 요구는 신문의 그런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단 그런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문이 주체적으로 바른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도 정정기사에 대한 재고 (再考)가 있어야 할 줄 안다.

사실 신문의 공신력을 생각하면 정정기사를 내는 것, 그것도 크게 내는 것은 자칫 공신력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기사를 독자에게 전달하고도 그것을 정정하지 않거나 인색한 것은 더욱 큰 공신력의 훼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하게 이야기해 그것은 공신력의 차원과는 별개 (別個) 의 죄악이라고 지적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독자의 신뢰를 가장 크게 받는 신문의 존립조건이란 무엇일까. 정정기사의 측면에서 그것을 말한다면 독자에게 신문의 잘못을 솔직하게 알리는 신문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그것도 여태까지의 정정기사와는 달리 기사나 편집내용에서 새 모습을 보인다면 독자의 신뢰가 한층 높아지리라고 믿는다.

더군다나 일방통행적인 기사나 일방통행적인 정정기사의 문제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정기사와 관련해 지난 주말의 중앙일보를 보면 그야말로 희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이런 일이란 우리나라의 신문에선 거의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란 신문의 공신력도 공신력이려니와 기사정정의 이색 (異色) 성으로 말미암아 신문의 역사, 특히 편집의 역사에 남을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앙일보가 정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본지 3월13일자 4면 '고스톱 파문' 기사의 관련의원중 Y의원은 '경남' 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이 기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의원회관 안에서 국회의원들이 '고스톱' 을 쳤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인데 의원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밝히지 않고 영문 이니셜로 익명 (匿名) 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한데 정정기사를 중심으로 평가한다면 이 기사는 두가지 점이 지적돼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당사자의 실명기사와 익명기사의 조건과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익명을 다시 익명으로 정정하는 것의 당위성 (當爲性) 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중앙일보가 비록 익명으로 당사자를 표기했을지언정 그것을 정정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정정이란 대개의 경우 당사자의 요구가 있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일 뿐더러 익명기사 자체가 당사자의 명예와 관련된 것일 때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그런 정정이 당사자의 명예를 위해 정당성을 지닌다손치더라도 익명으로 말미암은 명예의 손상은 결코 익명의 정정으로 보상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실명을 밝힘으로써 경남 Y의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정도 (正道) 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독자의 처지에서 보면 이번 국회의원들의 화투놀이 사건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며,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문들은 한결같이 그런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감추고 Y니, K니 하면서 독자들을 수수께끼의 대상으로 우롱함으로써 더욱 분통터지게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물론 명예훼손이라는 법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름을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공직자, 특히 국회의원이 의원회관 안에서 그것도 국회 회기중에 거의 상습적으로 거액의 판돈을 걸고 도박을 일삼은 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엔 이미 명예운운할 차원이 제각 (除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일부 국회의원의 화투놀이 사건은 첫 보도이후의 진전경위를 보더라도 여러가지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물론 보도에 따른 파문으로 말미암아 국회차원이나 정당차원에서의 사과나 대책이 전해지곤 있지만 그것이 국민 전반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문들은 사건 자체의 보도에선 거의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첫 보도에서 익명으로 기사화했다고 해 모든 신문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익명을 익명으로 정정하는 기사까지 나온 상황이니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 지 난감할 따름이다.

비록 정정기사가 신문의 공신력과 직결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실보도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고, 그런 바탕에서라면 구태여 익명의 기사를 쓸 까닭이 없을 줄 믿는다.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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