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통계에 목맨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 정경민 경제부 기자

지난 6일 경제정책협의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통계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지표상 경기는 괜찮은데 중소기업과 서민은 왜 죽겠다고 아우성이냐는 것이었다. 통계가 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자 9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나섰다. 통계청장을 1급에서 차관급으로 격상시키고, 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통계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 입장에선 5%대의 경제성장에 3%대의 물가상승률을 유지하면서도 200억달러가 넘는 국제수지 흑자를 내는 상황에서 경제가 어렵다는 비판이 나오는 게 껄끄러울 수도 있다. 경제의 밝은 면을 보여주는 통계수치를 들어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통계가 경제의 실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통계시스템을 바꾼다고 새삼스럽게 안 보이던 현상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지적에 대뜸 통계시스템을 뜯어고치겠다고 나선 정부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지표만 보고 경기 양극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출로 돈을 벌고 있는 대기업이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를 기피하고 있다는 통계는 이제 식상할 정도로 언론의 단골메뉴가 됐다. 고소득층과 20, 30대 젊은 층의소비심리까지 얼어붙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한국 경제의 문제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통계수치는 이미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돈이 있는 대기업이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아 10년, 20년 뒤에 우리가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게 현실이다. 소비 위축으로 내수기업이 고사해 청년실업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올해 5% 성장에 200억달러 국제수지 흑자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앞으로 계속 성장을 하고 수출을 유지할 수 있는 체력을 잃는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경기의 양극화는 성장 잠재력마저 훼손할 수 있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범상치 않게 들린다.

통계청장의 급을 높이고 새 통계지표를 개발한다고 이런 경제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계는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이다.

새 통계를 찾는 일보다는 정부가 경제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 급한 일이다. 돈을 깔고 앉아 있는 대기업과 소비층이 투자와 소비를 기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보면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정경민 경제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