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칼럼] 회사 밖으로 파편이 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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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기업의 구매팀 직원 중에는 협력업체에 대금을 부풀려 지급하고, 그것을 다시 되돌려 받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번 거래 과정에서는 그런 요청을 받은 바도 없었던 터라, ‘역시 대기업은 다르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K사장으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황당한 것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일단 상황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K사장은 부리나케 T사로 들어가 구매2팀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면담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닌가? 대기발령 상태라나 뭐라나?

더 황당해진 K사장은 감사팀에 전화를 걸어 해명을 요청했는데, 감사팀 실무자는 이미 사내감사 결과 구매2팀 팀장도 잘못을 인정했으니 그렇게 아시고, 부풀린 대금 반납만 하면 검찰 고발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빨리 반납을 하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아니, 해명할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걸 확‘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해버려? 3억 원 안주고 버티면 니들이 어떻게 할 건데? 아니지,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서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다른 대기업에도 납품을 못할 텐데? 아! 이런! 이번에는 헛장사한 셈치고 그냥 포기해? 그럼, 내가 죄를 인정하는 셈인데, 그건 아니잖아?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K사장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적극적으로 ‘아니다’라고 해명을 하면서 공정거래위에 법정투쟁까지 불사하면서 맞설 것인가 아니면 다 알겠는데 ‘난 억울할 뿐이고’, 나도 직원들과 살아야 하니까 반납 대금을 절반 정도로 줄여줄 수 없느냐고 읍소를 할 것인가?

아니? 그런데, 있지도 않은 비리를 저질렀다고 인정한 구매2팀 팀장은 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이 자만 잘 해명을 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그래도, 한 번은 그 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K사장은 어렵게 다리를 놓아 첩보전을 하듯이 비밀스럽게 대면할 수 있었는데...

그 자의 첫마디는 ‘사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였다.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 공모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나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진짜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구매2팀 팀장의 이어진 사연은 이랬다. ‘사장님, 전 회사에서 마이너리티입니다. 구매2팀 팀장 자리도 본래 A부사장 라인의 다른 사람이 맡을 예정이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해외근무를 나가는 바람에 용케 저한데 기회가 온 거고요.’ 그래서?

‘그런데 팀장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그냥 놔두질 않더라고요. 사장님 회사 건 이외에도 여러 건으로 감사팀의 감사를 받아야 했어요. 알고 봤더니 A부사장 라인의 회계팀장이 감사팀에 여러 차례 조사를 의뢰했더라고요. 그렇게 6개월을 긴장 속에 또 불면증에 허덕이며 보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제가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손을 들다니, 어떻게?

‘이번에는 감사팀에서 아예 그러더군요. 그냥 잘못했다고 해라. 그러면 경징계를 하는 선에서 처리하고, 지금 부서보다는 못하겠지만 다른 부서로 옮겨서 계속 근무하게 해주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겁니다. 사장님한테는 면목이 없지만, 저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긴 했지만,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아마 구매2팀 팀장에는 A부사장 라인의 사람이 새로 올 겁니다. 사장님께서 앞으로 우리 회사와 거래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계속 거래를 하시려면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고 조용히 계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A부사장은 차기 사장 1순위 아닙니까? 그리고 업계에 소문나면, 다른 회사하고도 거래 못하세요.’

뭬이야! 더 답답해진 K사장, 열이 화악 치밀어 올랐지만, 헤어질 때는 그자의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의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해한다... ...그런데 난 이제 어쩌니?’ 그날 이후 K사장은 도전의욕을 접고 말았다. 그리고 읍소 모드로 급돌변, 결국 2억 원을 돌려주는 선에서 일을 정리했다. 고발 없이, 거래금지 업체 리스트에 올라가는 일도 없이.

사내정치는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위 사례처럼 회사 경계를 넘어 협력업체에 또는 경쟁업체에도 자주 영향을 미치곤 한다. 뭐~ 경쟁업체 간에는 이 회사의 극렬한 사내정치로 저 회사가 이익을 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핵심인력이 대거 이동해 간다거나, 핵심정보가 흘러 들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반면에, 협력업체의 경우에는 파편이 날아와서 피’를 봐야 할 때가 많다.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다는 것이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이 나쁜 사내정치를 잘 관리해준다면, 협력업체들이 엉뚱하게 설움을 당하는 일도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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