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IMF 재수생의 새다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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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전 필자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개최된 '경제개혁에 관한 국제회의' 에 참석한 바 있다.

이 회의에는 주로 중남미 제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동구권 여러나라의 전.현직 재무장관들이 참석했다.

각기 여건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문제를 두고 고민해본 경험을 가진 경륜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경제개혁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을 도출해보자는 목적에서 개최된 흥미로운 회의였다.

그런데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한국경제발전에 관한 '성공담' 을 들려줄 것을 요청받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국제통화기금 (IMF) 긴급구제금융대상으로 전락한 한국경제의 '실패담' 을 듣는 것이 모든 회의 참석자들의 주관심사였다.

모두가 실력을 인정해 온 우등생의 낙방에 모든 급우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30여년간 우리나라는 모든 개발도상국 중에서 경제에 관한 가장 모범적인 우등생으로서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돼 온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87년에 우리나라는 1965년 개소 이래 22년간 활동해 온 IMF 상주대표사무소를 닫고 'IMF졸업생' 이 됐다.

그런 우리나라가 이제와서 IMF 긴급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또다시 IMF 상주대표소를 열게 된 'IMF재수생' 이 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그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대다수 참석자들이 "너희도 별수 없구먼" "좀 잘된다고 거드름 피우더니, 쓴맛 좀 보는군" 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단지 필자의 자격지심 (自激之心)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 우리 모두는 지난 30여년간 우리가 이룩해낸 경제적 업적에 스스로 도취돼 실력 이상으로 거드름을 피우거나 남의 눈에 오만해 보일 정도로 행동한 측면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10여년간만 돌이켜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잘못한 일은 너무나 많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는 그동안 이룩해낸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정치민주화의 급한 물결을 맞게 됐고, 경제발전에 상응하는 정치발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주화란 미명아래 밀어닥친 경제논리를 무시한 각종 집단이기주의와 이에 영합 (迎合) 하는 정치적 대응으로 경제구조는 왜곡되고 국가경쟁력은 크게 떨어지게 됐다.

게다가 정부는 이미 과열기미가 있는 상황아래서 주택 2백만호 건설계획과 같은 무리한 시책을 단기간에 추진함으로써 생산성을 초월하는 임금상승을 부채질하고 우리 경제의 거품을 더욱 조장했을 뿐 아니라, 우리경제의 고비용.저효율구조를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우리의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세계화시대의 무한경쟁을 외면한 채 차입위주의 외형성장에만 급급했다.

이즈음에 들어온 소위 '문민정부' 는 고통이 수반되는 우리경제의 구조조정을 위한 시책을 추진하는 대신 신경제 1백일계획이라는 단기 부양책을 채택해 우리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일시적으로 묻어버리는 데 만족했다.

또한 정부는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자본거래를 자율화하기에 앞서 금융의 건전성 확보를 위한 감독체계와 국제규범에 맞는 각종 금융통계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기반마저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더해 경제정책의 기획.조정기능을 약화시키는 경제부처 조직개편과 잦은 경제부처장관 경질로 경제정책의 신축성과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은 크게 손상됐다.

그 결과 지난해 7월초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 외환.금융위기의 전염을 차단하지 못하고 우리경제의 허약한 체질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IMF재수생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IMF 재수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한 노력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국민적 단합과 정치안정을 이룩하는 일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과오를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

사공일〈세계경제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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