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비상구가 없다]수하르토 독재 절망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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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인도네시아 외환위기는 수하르토 대통령을 압박하는 정치위기로 바뀌고 있다.

경제위기가 정치위기와 오버랩되면서 인도네시아 사태에 비상구가 안보인다.

사정이 이렇게 된 최대의 원인은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수하르토가 동시에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수하르토가 32년을 장기집권하고도 내일 (3월10일) 일곱번째로 임기 5년의 대통령에 선출된다.

개인연구소를 운영하는 경제전문가 리잘 람리는 지난 2월말 자카르타를 방문한 기자에게 수하르토가 매일 저녁식탁에서 만나는 아들과 딸들의 말만 듣고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수하르토 일가가 얼마나 현실감이 없는 사람들인가를 증명하는 예를 하나 들었다.

"며칠전 수하르토의 장녀가 ㎞당 건설비 1억달러가 드는 총연장 14㎞의 자카르타 지하철공사 건설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긴축재정이 국제통화기금 (IMF) 으로부터 3백30억달러의 금융지원을 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인데, 지금 지하철을 깐다는 발표는 IMF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람리는 걱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하르토는 지난 1월 경제성장률 4%, 인플레 9%, 환율 4천대1을 전제로 하는 98년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구제금융의 합의를 지킨다면 성장률 1% 이내, 3월까지 인플레 30% 이상을 각오해야 한다.

텍사스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그 뉴스에 접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즉석에서 수하르토에게 전화해 그런 예산안의 '불가함' 을 엄중히 지적했다.

결국 수하르토는 1월을 못넘기고 IMF와 두번째의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번에는 루피아화를 환율 5천5백대1로 달러에 묶는 고정환율제를 들고 나와 미국과 IMF와 서방선진7개국 (G7)에 도전했다.

수하르토가 대단한 집념을 보이던 이 구상도 외부의 압력으로 일단 유보됐다.

비현실적 예산안과 고정환율제 구상은 모두 수하르토가 IMF와의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비춰져 외환위기 해결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수하르토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구제금융의 조건을 시행하면 수하르토일가의 경제적 이권인 국민차 구상 및 향료.밀가루의 독점과 은행경영 참여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

IMF와의 합의대로 하는 것은 또 지난 32년동안 수하르토체제를 떠받들어 온 개발독재노선의 대폭 수정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두번이나 문서로 약속한 합의를 안지키면 구제금융은 중단되고 인도네시아는 국가부도를 낼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는 2년 연속 가뭄과 칼리만탄의 산불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기업이 속속 도산하고 실직자가 속출한다.

양순한 인도네시아 국민들도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자카르타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식량폭동 사이 사이에서 수하르토의 퇴진을 요구하는 소리가 점점 자주 들린다.

수하르토는 소요사태가 자카르타까지는 확산되지 않고 본격적으로 자신에 반대하는 운동은 없을 것으로 낙관하는 것 같다.

사실 최고통치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자바의 전통에 어긋난다.

과거 자바왕국의 국왕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는다.

국왕이 죽으면 왕자들이 싸움을 하여 이긴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최고통치자는 하늘로부터의 계시인 '와유 (Wahyu)' 를 받아야 후계자를 지명한다.

그러나 와유를 받았는가의 여부와 그 내용을 판단하는 것은 최고통치자의 몫이어서 물러나기 싫으면 하늘로부터 와유가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된다.

자바족인 수하르토도 그 전통에 의지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여섯명의 부통령을 모두 단임으로 끝내게 했다.

이번에 하비비가 부통령에 선출되어도 수하르토 유고때 그 후임을 결정하는 것은 군부다.

하비비는 최대종족인 자바출신도 군출신도 아닐 뿐 아니라 군부와는 불편한 관계여서 그가 포스트 수하르토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제로다.

지난해 7월까지 1천2백달러이던 인도네시아의 개인소득은 절반이하로 떨어졌다.

97년의 마지막 4개월 동안에 발생한 실업자가 80만명이고 올 3월까지 이번 외환위기로 인한 실업자만 2백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총외채가 1천3백억달러나 되고 금리가 30%가 넘어도 기업들은 은행융자를 할 수가 없다.

식량난을 포함한 경제사정이 계속 나빠지면 자카르타도 폭동과 반정부데모에서 자유롭지 못할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하늘의 계시라는 '와유' 의 전통도 수하르토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해 외환위기로 시작된 인도네시아 사태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경제에 충격을 주는 대재앙으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

이런 불길한 전망속에 외국자본이 돌아올 리가 없다.

10일 이후 수하르토가 어떤 경제조치를 취할 것인가가 주목된다.

그러나 그가 매일 저녁 식탁에서 아들.딸들과 여는 '실질적인 국무회의' 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인도네시아의 경제회생에 필요불가결한 근본적인 구조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자카르타에서 만난 기업인.언론인과 전문가들의 견해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정치적인 장래와 관련해서는 76세인 수하르토의 고령과 건강도 문제다.

부통령 하비비가 수하르토를 계승하지 않는다면 수하르토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후임이 선출되는 과정의 혼란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

수하르토가 건재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부패 때문에 문제고, 그렇다고 당장 물러나거나 유고 (有故)가 되면 더욱 문제인 것이 인도네시아 위기의 특징이다.

수하르토는 지난 30년동안 연평균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주도해 극빈자 비율을 65년의 80%에서 97년 20%로 끌어내리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수하르토의 30년 공든탑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감기들면 한국이 재채기를 하는 세계화시대, 아시아의 동일생활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국가부도사태 같은 불행은 한국의 금융위기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도 있어 걱정이다.

〈김영희 대기자 현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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