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문명과 침략도구, 철도의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1면

 1876년 수신사 김기수는 기차를 타고 “담배 한 대 피울 사이”에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왔다. 철도가 일본에 깔린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맨 앞의 화륜차가 움직이니 뒤차 바퀴도 따라 구른다.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달리니 비바람이 휘몰듯 한다. 한 시간에 삼사백 리를 간다는데 차체는 안온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다. 산천과 초목, 집과 사람이 보이긴 하는데 앞에 번쩍 뒤에 번쩍 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경탄만 했지 조선에도 철도를 깔 욕망을 품지 못했다. 1881년이 되어서야 조선왕조는 문명개화의 모범답안을 일본에서 찾고자 했다. 서구화된 근대문물의 이모저모를 일본 방방곡곡을 누비며 살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그들은 오사카와 고베, 요코하마와 도쿄를 잇는 철도로 도쿄에 갔다. 그때 그들은 철도 부설비용이 국가 재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놓고 논전을 벌였다. “매년 수입은 80여만원이나 철로 보수비용이 해마다 50만원이 넘게 든다. 수입에서 비용을 빼면 고작 30만원 남짓 남는다. 이 수익금으로 가설비용을 갚으려면 30년이 넘어야 다 갚는다. 하물며 애초 가설비 모두가 국채다. 매년 순수익금은 이자를 갚을 정도에 불과하니, 원금을 언제 갚을지 기약할 수 없다.” 유지보수비를 뺀 운영수익으로는 국채 이자도 대기 어렵다는 우려가 중론이었다. 우리는 공간을 단축하며 질주하는 근대문명의 상징인 철도를 자력으로 깔 기술도 재력도 없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이 흐른 1899년이 돼서야 이 땅의 사람들은 굉음을 울리며 질주하는 철마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33.2㎞를 1시간40분에 달린 미국제 모갈 탱크형 증기기관차(사진)를 감싼 일장기가 웅변하듯이, 경인선 철도는 우리가 아닌 일본의 손으로 놓았다. 수도 서울과 관문 인천을 잇는 이 철로로 일본은 우리 목덜미를 감아쥐었다. 최남선은 1908년 창가 ‘경부철도가’를 지어 근대문명의 상징 철도를 찬미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경부선과 경의선, 호남선과 경원선 등 일제가 놓은 철로망은 1919년 총 연장 2197㎞에 달하였지만, 8할은 국내에서 물자와 사람의 오고 감이 아닌 대륙과 일본을 잇는 병참 및 상품 수송 목적으로 깔렸다. 이 때문에 식민지 백성의 눈에 비친 철도는 근대문명의 이기이자 침략의 칼날이라는 두 얼굴의 야누스로 다가섰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