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중환자실서 나왔지만 회복엔 5년 이상 걸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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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교수가 19일 세계 경제금융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단 환자가 중환자실에선 나왔다. 그러나 회복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계 경제상황에 대한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의 진단이다. 19일 한국경제TV 주최로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세계 경제금융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을 맡은 그는 “몇몇 경제 지표를 볼 때 경기가 몇 달 안에 바닥을 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경기 회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8, 9월께 공식적 의미의 경기침체(Recession)가 끝난다 해도 2013, 2014년까지는 경제가 회복된 모습을 보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 생산이 회복되더라도 고용 사정은 한동안 계속 나빠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가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빠른 회복 불가능”=역사적으로 볼 때 경기침체가 끝난 직후 경제 사정이 급격히 좋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른바 ‘V’자형 반등이다. 그러나 크루그먼 교수는 “이번 경기침체에선 이를 기대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침체가 끝난 뒤 회복되는 시점이 점점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로 시작된 2001년 경기침체 역시 공식적으론 8개월 만에 끝났으나, 실업률은 2003년 6월까지 나빠졌다. 그는 “올 하반기 미국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다 해도 노동시장은 몇 년간 계속 나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회복 궤도에 오르기까지 걸림돌이 많다고 밝혔다. 먼저 각 가정·은행이 지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빚을 꼽았다. 이 빚을 털어내기 전까지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미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 미국의 저축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회복에 대한 기대를 꺾는다. 그만큼 소비가 늘지 않을 거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정부의 경기부양책 규모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장 경기하강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수준일 뿐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정도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세계가 일본식 불황 가능”=크루그먼 교수는 “전 세계가 일본식의 ‘잃어버린 5년 혹은 10년’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공급이 재개돼도 수요가 모자란 상태가 지속되는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2004년 수출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 대공황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엄청난 수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가 동시에 불황을 겪고 있는 지금은 그런 호재를 기대하기 힘들다”며 “다른 행성으로 제품을 팔지 않는 한 수출 주도형 회복은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 금융위기가 길어지는 것에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고통이 큰 만큼 가슴 속에 잘 새겼다가 다음 위기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다. 그는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이번 금융위기의 ‘리허설’이었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간 동유럽에 자금이 몰렸던 것과 90년대 말 태국·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닮은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떠올리며 똑같은 위기가 터질 수 있음을 경고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이전의 위기를 쉽게 잊고 ‘그런 위기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하는 게 화를 키웠다고 그는 지적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번 위기가 너무 빨리 회복돼 쉽게 잊혀진다면 2018년께 더 큰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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