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 칼럼]독립운동 사료의 소극적 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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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내가 주목했던 기사의 하나는 러시아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 (聲明會)' 의 결성취지서 한글판 원문이 88년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는 것이었다.

국가보훈처 사료연구위원 박종효 (朴鍾涍) 씨가 러시아문서 보존소에서 찾아내 공개한 이 취지서는 몇가지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 (史料) 로 평가된다고 한다.

첫째로 이 취지서는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이나 1919년의 3.1독립선언보다 앞선 1910년 8월23일에 발표된 것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 취지서 서명인엔 한말의 의병지도자 유인석 (柳麟錫).이범윤 (李範允).김좌두 (金佐斗) 선생과 러시아지역 한인지도자 김학만 (金學萬).차석보 (車錫甫).김치보 (金致寶) 선생 등이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이 취지서의 발표후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결사대가 잇따라 조직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 취지서가 대중적 토대위에서 이뤄진 최초의 독립취지서이고, 그것이 순한글로만 이뤄졌다는 데서도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의 유수한 신문들은 이 기사를 취급하는 데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다.

심한 경우는 아예 기사를 다루지 않았고, 겨우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보도에만 그쳤을 뿐 역사적 평가는 소홀히 했다.

물론 새로 발굴된 역사적 자료의 가치에 대해서는 성급한 평가를 내리기보다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사 자체를 다루지 않고 가치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독립운동과 관련한 자료에 대해서는 그것이 새롭게 조명됨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올바른 정립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매스컴의 적극적인 자세가 절실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는 아직도 보완돼야 하고 바로 잡혀야 할 구석이 적지 않다고 지적되고 있는 형편이다.

비단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난 1백년 역사에는 이른바 암흑 (暗黑) 지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마저 있을 정도다.

이런 문제들이 배태된 배경을 생각하면 역사의 현장에 있는 목격자 또는 기록자로서의 신문 기능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기록의 불가피한 담당자로서 신문의 존재가치는 어떤 경우든간에 과소평가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오늘의 시대상황은 신문이 적어도 세가지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는 식민사관 (植民史觀) 을 극복하는 일이다.

일제 (日帝)가 기도했던 우리 역사의 왜곡 내지 조작은 비단 상고사 (上古史) 뿐만 아니라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것이었다고 지적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것이 제대로 바로잡혔다는 소리가 여태껏 들려 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신문이 외면하거나 간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둘째는 분단사관 (分斷史觀) 을 극복하는 일이다.

역사를 어떤 이데올로기든 간에 색안경을 쓰고 본다는 것은 결국 색맹사관 (色盲史觀)에 다름아니며 거기에는 올바른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이 애당초부터 존재의 터전을 잃게 마련이다.

따라서 거창하게 역사인식 또는 역사평가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신문기사가 가치중립 (價値中立) 또는 몰가치 (沒價値) 의 냉엄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강조돼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셋째는 사대사관 (事大史觀) 을 극복하는 일이다.

사대사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오랜 역사속에 체질화된 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되고 있거니와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을 극복해야 할 매스컴의 책무는 커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더군다나 국제화 내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때 그것은 쇼비니즘이어서도 안되고 사대주의여서도 안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돼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주에 공개된 러시아지역 독립운동단체 결성취지서는 때마침 3.1절을 계기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조명과 종합적 평가가 신문에 의해 시도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못내 남는다.

뿐만 아니라 이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할지라도 가장 오래된 태극기가 발견됐다는 소식과 애국가의 작사자를 가리는 세미나 기사가 중앙일보를 비롯한 유수한 신문에서 적극적으로 보도되지 않은 것도 유감스런 일이었다.

지금까지 태극기에 관해 알려진 바로는 1882년 박영효 (朴泳孝) 등이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사용한 게 최초이고, 고종황제가 1883년초 대한국기 (大韓國旗) 로 제정공포했다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1874년 발간된 청나라 문서속에 태극기가 고려국기로 그림까지 곁들여 기록됐다니 그것은 분명 뉴스거리가 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물론 태극기는 그것이 우리의 전래 (傳來) 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오늘날 국기로서의 태극기조차도 '태극' 과 '괘상 (卦象)' 에 문제가 있다는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고 (最古) 의 태극기 발견소식은 여기에 또 하나의 논란거리를 추가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란은 새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지금 '역사' 의 문제와 함께 작사자도 분명치 않은 '애국가' 와 '국가' 의 문제, 그리고 태극과 괘상이 시비거리인 '태극기' 와 '국기' 의 문제 등 근본문제를 그대로 둔 채 혼미속에 빠져 있는 꼴이 아닌가.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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