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인생, 담담한 시선으로 풀어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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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03면

2009 서울국제도서전을 위해 내한한 에쿠리 가오리. 39냉정과 열정 사이39에서 호흡을 맞춘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신작 39좌안3939우안39(소담출판사)도 막 출간됐다. 사진=연합뉴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 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 버린다.”(『낙하하는 저녁』중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

이별의 고통을 고된 일로 이겨 보려 했던 기억이 있다면 누구나 에쿠니 가오리가 쓴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맞다. 헤어짐의 고통을 멀리하려면, 헤어짐을 현실 바깥으로 밀어내야 한다. 헤어짐 때문에 뒤틀리고 추락하는 일상을 절대로 인정하면 안 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변함없이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이 헤어짐을 이기는 방법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기는 것이 아니고 동거하는 것이다.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고독과 함께 살아가는 것. 에쿠니 가오리는 그 고독하고 우울한 일상을 감각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려 낸다. 따뜻하게 그들의 일상에서 뭔가 의미를 찾아내 들려준다. 에쿠니 가오리가 보여 주는 나른하면서도 쿨한 일상과 사랑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에쿠니 가오리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작가다. 처음 나온 『냉정과 열정 사이』는 100만 부가 팔렸고, 『반짝반짝 빛나는』은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고, 『홀리 가든』『웨하스 의자』『장미 비파 레몬』 등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대부분이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 『냉정과 열정 사이』가 출간됐던 2000년만 해도 국내에 소개된 일본 작가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롱 베스트셀러가 되고, 요시모토 바나나와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가끔 화제를 모으는 정도였다.

『냉정과 열정 사이』가 인기를 끈 이유는 독특한 이야기 형식과 쓸쓸하면서도 산뜻한 정서 때문이었다. 준세이와 아오이는 한때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상태다. 그들이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틈틈이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에쿠니 가오리가 한 화를 쓰면 이어서 쓰지 히토나리가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동일한 상황과 기억이 남녀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남겨지고, 이별의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견뎌 내는 과정을 보면서 동성에게 공감하고 이성을 이해하게 된다. 밀레니엄을 염두에 둔 일종의 기획소설이었지만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였고, 특히 에쿠니 가오리가 그려 낸 아오이의 다소곳한 내면 풍경은 한국의 여성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후 출간된 『반짝반짝 빛나는』을 통해 에쿠니 가오리는 스타 작가가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게이 남편과 알코올 중독 아내의 묘한 결혼생활을 그린다. 남자를 사랑하는 무쓰키와 정서불안인 쇼코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정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결혼을 택한다. 그리고 무쓰키의 애인까지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고 인생이, 그들이 바뀌지는 않는다. 늘 흔들리고, 무엇인가가 결핍된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작은 일상의 소중함을 껴안고 살아간다. 불완전하지만 따뜻한 연대가 『반짝반짝 빛나는』에는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달리 에쿠니 가오리의 독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그것도 20대부터 40대까지를 모두 아우른다. 가장 큰 이유는 에쿠니 가오리가 여성의 심리와 일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못하는 것 같아…그래도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을 가장 사랑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아마.”(『장미 비파 레몬』), “정말 멀리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정말 외톨이라 생각하고, 그래도 세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가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세수는 해야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는 닦아야 하고, 아무리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한다.”(『홀리 가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도쿄 타워』),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 절대 앉을 수 없다.”(『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는 늘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부분이 그 투명한 정서에 끌리지만, 어떤 독자들은 그것이 단지 제스처일 뿐이라며 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가 2004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단편집 『울 준비는 되어 있다』에 붙인 말을 들어 보면, 왜 에쿠니가 끊임없이 그 쓸쓸한 이야기를 반복하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기억을 안고 다양한 얼굴로 다양한 몸짓으로, 하지만 여전히 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색깔이나 맛은 달라도, 성분은 같고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사탕 한 주머니 같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 부르고 싶습니다.” 알고 있어도, 이미 경험했어도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들어 불타 오르고, 다시 헤어짐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에쿠니 가오리는 정서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 주는 각각의 삶의 색깔을 그 순간마다 잡아내는 작가다.

물론 나이 마흔의 여성을 스무 살의 남성이 사랑하는 『도쿄 타워』같은 소설을 보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한편으로 여성의 판타지 자체가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시후미는 작고 아름다운 방과 같다고, 도루는 가끔 생각한다. 그 방은 너무 편해서, 자신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도쿄 타워』) 하지만 판타지 또한 삶의 일부이고, 판타지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 어리석은 일도 아니다. 편하고 아름다운 판타지를 꿈꾸면서 우리는 일그러진 일상을 견뎌 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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