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고비넘긴 이라크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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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국의 길로 들어설 것 같던 이라크와 미국의 무력충돌 위기가 일단 수습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라크 정부가 유엔에 대해 자국내 무기사찰을 허용하겠다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약속함으로써 조사활동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가 무력응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해 온 미국이 관망자세로 돌아서고 있다.

자칫 세계적인 긴장을 촉발할뻔 했던 위험스러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게 된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응징 주장은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은닉한다는 의혹을 받는 이라크가 진상을 밝히려는 유엔무기사찰단의 조사활동을 허용하지 않고 방해한다는데 근거한 것이었다.

대량살상무기 생산.은닉 혐의를 포착해 유엔 사찰단이 조사하려 하자 갖가지 이유를 들어 방해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을 비롯, 국내 반정부세력 진압작전에서 겨자탄 등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력이 있어 국제사회의 경계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이라크는 이러한 무기의 존재를 부인하며 유엔무기사찰단이 지목한 특정지역에 대한 조사활동을 거부해 의혹을 가중시켜 왔다.

그런 측면에서 이라크가 유엔무기사찰단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찰활동을 허용하겠다고 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합의 자체가 아니라 이라크 정부가 얼마나 약속이행 의지를 갖고 있느냐다.

미국을 비롯해 무력응징에 동조했던 몇몇 나라들이 이번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지켜보겠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는 외교적 대화를 통해 국제적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무력개입이 감행됐을 경우 의견을 달리했던 강대국들의 대립으로 빚어졌을 국제적 긴장과 국제원유시장의 혼란도 피할 수 있게 됐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도 이라크사태의 진정에 따른 원유시장의 안정은 바람직한 일이다.

뿐만 아니다.

존 틸럴리 주한 미군사령관이 지적했듯 미국의 대 이라크 군사행동은 주한미군의 대북 (對北) 군사억지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도 우리는 이라크 사태를 주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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