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책 좋아하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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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92년 1월 대통령취임을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백악관 '안살림' 을 넘겨받기 위해 처음으로 백악관을 찾았다.

퍼스트 레이디 바버라 부시 여사의 안내로 백악관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던 그녀는 그 흔한 책장이나 서가 하나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상에, 미국의 대통령이 이럴 수가…' 하는 그녀의 탄식이 미디어들의 입방아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부시 대통령은 일년가야 책 한권 읽지 않는 '맹탕' 은 아니었다.

명색이 예일대 경제학부를 나왔다.

책보다 골프를 더 좋아했다.

백악관뜰 잔디공간에 구멍이 27개나 되는 퍼팅그린을 만들어 틈나는대로 퍼팅연습을 했다.

영국 대처 총리와의 버뮤다 정상회담때는 대처 총리의 남편을 같이 오게 해 그 남편과 함께 골프를 쳤을 정도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임 8년동안 골프장 출장횟수가 8백회를 넘는다.

1년에 1백회, 주2회꼴이다.

아이젠하워는 오늘날 아놀드 파머와 함께 미국에서 골프의 대중화를 선도한 주역으로 더 추앙받는다.

클린턴 대통령은 가위 '독서광' 이다.

1주일에 보통 서너권씩 읽어치운다.

대통령전용기는 물론이고 헬기를 이용한 짧은 나들이때도 읽을 책을 꼭 지니고 다닌다.

딸과 함께 서점에 들러 신간을 직접 고르기도 했다.

머리가 좋고 식성과 정력이 왕성해 속독 (速讀)에다 다독 (多讀) 을 즐긴다.

무소불통의 박식함과 다변 (多辯) 도 이 독서 덕분이다.

남편 책 이삿짐을 풀 자리를 찾던 힐러리의 눈에 부시 대통령이 얼마나 '한심' 하게 비쳤겠는가는 짐작이 간다.

힐러리인들 어디 보통 '책벌레' 인가.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가 청와대에 가져갈 재산목록 제1호는 1만5천권의 장서 (藏書) 라고 한다.

옥중에서, 해외망명길에서, 동교동 연금시절에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곁에 두고 짬짬이 다시 들춰보기 위해서란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도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휑한 공간에 항상 꺼져 있는 책상 위의 컴퓨터가 TV에 비친 그의 집무실이었다.

손명순 (孫命順) 여사의 안내로 청와대를 둘러보며 서가놓을 자리를 궁리하던 당선자 부인 이희호 (李姬鎬) 여사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가 궁금하다.

물론 청와대는 책 읽는 곳이 아니고 일하는 곳이다.

책 많이 읽고 박식한 사람이 곧 훌륭한 대통령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너무 많이 알고 아이디어가 많으면 남의 말을 잘 안듣게 되고, 말이 헤프며, 국정운영에서 집중력 (focusing) 이 떨어진다.

바로 클린턴의 약점이다.

장서를 장식용으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마크 트웨인은 '누구나 꼭 읽어야지 하고 벼르면서도 정작 읽지 않는 책이 고전 (古典)' 이라고까지 했다.

설령 읽지 않더라도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마음가짐이 소중하다.

서가에 '1만5천 원군 (援軍)' 을 가진 당선자에 대해 문화.출판계의 기대는 남다르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문화계가 얼어붙고 출판업계는 대형서적상들의 연쇄부도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제조업종이 아니어서 중소기업지원금융의 대상도 못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 (國富) 의 원천을 분업의 원리에 입각한 자유시장경제에서 찾았다.

지금은 '아이디어 국부론' (Wealth of Notions) 시대다.

산업.기술.경영의 꾸준한 혁신은 지식산업 인프라의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새 정부의 1백가지 국정과제 속에서 이에 관한 철학과 구체적 실천전략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화와 출판이 배부를 때나 찾는 '치장' 일 수는 없다.

IMF사태는 단순한 외환.금융위기를 넘어 우리의 사고방식과 의식, 행동양식, 문화의 위기다.

그러잖아도 입시참고서에 매달리고, 흥미위주의 일과성 (一過性) 출판물들이 판을 치는 우리의 알량한 독서문화다.

IMF한파로 이나마도 움츠러든다면 나라의 장래는 암울하다.

당선자가 청와대에서 '독서삼매경' 에 빠지는 것을 국민은 원치 않는다.

국가경영 전반에서 '책 좋아하는 대통령' 다운 면모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변상근〈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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