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화장은 무죄?…연예용·선거용서 일반인에 유행 조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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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80년대 인기그룹 '컬처 클럽' 의 보이 조지를 기억하는지. 길게 땋은 머리, 분가루가 폴폴 날릴 것만 같은 뽀시시한 얼굴에 빨간 입술…. 많은 사람들이 보이 조지를 여자로 알았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곱게 화장한 남자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신촌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무심코 마주 오던 이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눈매를 또렷하게 강조한 아이라이너에 번쩍거리는 립글로스. 결코 여자는 아니었다. 가죽점퍼에 청바지 차림의 건장한 남자였으니. "

대학생 신종훈 (22) 씨가 며칠전 겪은 일이다.

주위 사람들 중에도 화장한 남자를 봤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꽁지머리에 목걸이.귀고리, 이젠 남자 화장도 유행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부터 콤팩트를 발라왔다는 김모 (26.대학생) 씨의 말. “화장이요. 얼굴의 기름기도 커버할 수 있고 피부색을 보다 깨끗하게 표현해 주니까 좋지요. 맨얼굴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다르거든요. 주위 사람들은 화장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지만요. ”

아직까지는 '멋내기' 보다는 '감추기' 수준이지만 뜻밖의 말이다. 방송.연예인들에겐 원래 화장이 필수. 대중유세가 본격화한 87년 대선때부터 정치인들도 화장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PC통신엔 남성 화장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여성지에서도 남성 화장법을 소개하기 일쑤다. 남성들의 피부는 잦은 면도.흡연.음주 등으로 상하기 쉬운데다 모공이 넓어 여성 못지 않은 손질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변 (辯) . 이게 유행으로 번질 가능성에 대하여. 87년 컬러로션 등 남성 색조화장품을 내놓았던 ㈜쥬리아 홍보부 이중희 (49) 부장의 말은 이렇다.

“틈새시장으로 생각했지만 소비자 인식이 덜 되서였는지 당시 반응은 크지 않았습니다. 3만개를 생산한데 그쳤지요. 지난해엔 화장품 가게에 가길 꺼리는 남성들을 위해 방문판매용 파운데이션을 내놓았으나 이 역시 인기몰이엔 실패했고요.” 그래서 지금으로선 남성 색조 화장품을 개발할 계획은 없단다.

다른 업체들도 보류상태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미 80년대초부터 남성 화장이 유행했던 미국.유럽.일본의 경우를 보노라면 상황은 금방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지난해 미국에선 남성용 매니큐어가 큰 인기를 끌었을 정도니까. 본래 화장은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것이니만큼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심지어는 화장을 제례 (祭禮) 나 주술적인 것과 관련지어 남성의 전용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긴 고대 이집트 벽화에도 화장한 남자가 나오고 신라의 화랑들도 몸치장과 화장을 했다니까 억지는 아닌 듯하다.

'남성 화장 = 심리 치료' 의 등식까지 들고 나온다면 너무 비약일까. 화장으로 결점을 감추고 장점을 드러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런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금남 (禁男) 구역이었던 미용실.피부관리실 등이 이젠 남성 전용까지 나올 정도인 걸 봐도 그렇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의 화장에는 사회적 품위를 나타내는 것과 나르시시즘, 이중의 뜻이 있다' 고 말했다. 그러면 일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화장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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