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들, 후원금 급감으로 고사직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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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경제정의실천연합 H (37) 실장은 요즘 출근하자마자 대학동문 연락처를 들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닌다.

월 1만원의 후원금을 내줄 회원을 찾기 위해서다.

다른 간사들도 회원모집은 물론 서울시 등 정부기관의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정신없이 뛰고 있다.

H실장은 “모든 국민들이 어렵다지만 최소한의 생계비마저 끊긴 채 삶의 보람만으로 시민운동을 하기엔 고통이 너무 크다” 며 한숨을 쉬었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시민들의 후원금이 부쩍 줄어 그동안 경제정의와 민주화에 한몫을 했던 시민.소비자단체 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다.

물가조사 등 이들 단체의 할 일은 많아졌지만 돈줄이 말라 직원 월급은커녕 사무실 비용조차 제대로 지급하기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경실련의 올해 예산은 10억원내외. 이중 6억원 정도를 회비.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난달부터 30% 이상 줄었다.

간사들도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절반넘게 그만둬 30명만 남았다.

당장 경실련은 월 4백만원인 임대료를 줄이려고 지난 9년간 몸담았던 종로5가 사무실을 포기하고 비좁지만 독지가가 내준 서울 중구 정동빌딩 별관으로 21일 이전했다.

녹색소비자연대도 최근 회원후원금이 40% 이상 줄어 최소 생활비마저 지급이 어렵게 되자 간사 절반 이상이 그만둬 당장 활동이 여의치 않은 상태. 기업후원금을 받지 않는다는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모임은 연간 예산 2억원중 소비자 고발처리비를 빼면 간사들의 월급은 꿈도 못꿔 월 20만원의 활동비만 지급, 자원봉사 형태로 단체를 끌어가고 있다.

정부는 최근 물가감시를 위해 소비자단체의 가격정보요구권 등 권한을 확대키로 했으나 정작 중요한 예산은 추가배정하지 않은 상태. 현재 미국.유럽에서는 정부가 시민단체예산의 절반을 지원하는데다 시민들의 후원금도 끊이지 않아 종사자들이 별 걱정없이 시민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돼 있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 신종원 (辛鍾元) 부장은 “OECD국가중 비영리민간단체 (NGO)에 대한 지원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뿐” 이라며 “법적으로 금지된 지원금 모금이 허용돼 시민운동가의 최저생계비는 보장돼야 한다” 고 말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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