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0대 실직자의 하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21일 낮 서울 도심거리를 정처없이 걷고 있는 李모 (44) 씨의 마음은 잔뜩 찌푸린 겨울하늘만큼이나 착잡했다.

정들었던 직장, 사표 쓰라고 윽박지르던 사장, 밤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반갑게 맞아주던 가족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李씨가 실직자 생활에 들어간 것도 벌써 열흘째. 측량기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8년동안 현장반장으로 근무해온 李씨는 '실직' 이란 단어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해왔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1일 "경영악화로 직원수를 줄인다" 는 사장의 일방적인 통고와 함께 李씨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정리해고' 됐다.

탄광에서 번 돈으로 마련한 방 2개짜리 12평형 아파트에서 아내 (39).아들 (중1).딸 (중3) 과 넉넉지는 않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려온 가장에게 정리해고는 엄청나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매월 10만원씩 보내드리던 생활비를 이달부터 끊어야 하는 게 가장 큰 슬픔이었다.

실직 직후 李씨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오전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와 오후10시쯤 귀가해왔다.

"충격을 삭이기 위해 하루종일 버스타고 온 시내를 돌아다닙니다.

아무데서나 내려 마냥 걷기도 하고요. 직장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들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 실직자의 증표격인 직장 의료보험 상실확인서를 며칠째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만 아직 지역의료보험으로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며칠전 아내에게 어렵사리 실직사실을 털어놨지만 아이들이 병원에 갔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다.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근무로 여행은커녕 가족끼리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면서도 열심히 일만 했는데…. " 한숨 속에 계속되는 李씨의 배회는 언제쯤 끝이 날까. 박신홍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