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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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그들이 자리를 뜬 것은 새벽 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박봉환까지 자리를 비운 빈 방에 승희는 혼자 앉아 있었다.

네 남자가 남기고 떠난 네 개의 빈 방석을 그녀는 오랫동안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난전에서 팔고 있는 값싼 양은그릇들과 술잔들이 콧등이 시큰한 알콜 냄새를 풍기면서 술상 위에 뒹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 방만하고 난잡한 방안의 풍경들이 새삼스럽게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슬픔의 정체를 승희는 가만가만 반추하면서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의 자락들은 햇살에 쫓긴 안개처럼 금방 희미하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당초의 생각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째서 만난 지도 며칠 되지 않았던 한철규란 사람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연락 오기 바쁘게 진고개까지 달려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은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다는 것에 바로 소중한 무게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간직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몰랐다.

한철규는 길거리로 나가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다만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가 이혼한 사람이면서 실직을 당했고, 그래서 이 궁핍한 시대가 만들어낸 회오리바람의 중심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란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껍질일 뿐, 그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를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 승희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스스로 안달하고 매달렸던 하룻밤의 짧디 짧았던 열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일까. 상념이 그처럼 한자리에서만 맴돌고 있을 때, 세 사람을 배웅하러 나갔던 박봉환이가 방으로 들어섰다.

자신들이 짜낸 계략에 세 남자가 한결같이 속아 바라던 결과까지 매끄럽게 도달한 것에 박봉환은 도취된 듯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는 승희의 등 뒤에서 득의에 찬 박봉환의 말이 들려왔다.

"니 봐라. 내 언변이 그만하면 앞으로도 써먹을 만하제? 두 형님은 모르지만, 한선생만해도 며칠 전까지는 서울에서도 내로라카던 일류회사 부장 아이랬나. 그런데 바로 그런 분이 내가 몇 마디도 안했는데, 내가 둘러대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는 거를 니 눈으로 봤제? 알고 보면, 이기 바로 인생이라 카는기라. "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눈치 빠른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심성이 순진하니까, 자기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거예요. " "듣고보이 그 말도 틀린말은 아이다.

어쨌든 간에 니를 묵사발로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바로 낸 줄 알았뿌리는 날에는 내 신세가 당장 고단하게 될끼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안되겠나. 그걸 명심하고 니 앞으로도 입조심 단단히 하그래이. " "내 입조심 걱정 말고, 자기 손버릇이나 고쳐. " "니가 집까지 비우고 멀쩡한 궁디 (엉덩이) 씻으려고 씰데 없는 온천장까지 갔다카이 내가 버릇 고친다고 한 대 쥐어박아 준다 카는기 좀 과하게 됐지만, 니만 잘하면, 내가 무조건 손찌검할 일이 있겠나. 섭섭하더라도 그 일은 그만 잊어뿌러라. 우리끼리 앉아서 오손도손 소주 딱 한 병만 깔래? 니가 계략을 짜지 않았더라면, 내가 니 손찌검한 것이 꼽다시 들통나서 동업하는 일은 애당초 건방진 생각이었고, 주문진 어판장에는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할 뻔했잖나. 참말로 니 고맙데이. " "그토록 고맙거든 한 잔 따뤄. " "오늘은 내가 한 잔 따뤄준다마는 이게 버릇되면, 콩까리 집안 되는 것은 하루아침 해장거리니까, 니 알아서 처신 하그래이. "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잔을 내밀고 있는 승희의 눈 가장자리로 눈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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