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리는 YS정부…통일·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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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통일.외교.안보 분야 성적은 낙제점이다.

아니 부문별 점수로는 최악일 수 있다.

나라살림을 거덜내 수십년을 뒷걸음질치게 한 경제부문의 실정이 국민들의 피부에 더 와닿는 것이지만 IMF사태.외환위기 등 경제난이 민간부문의 책임과 해외경제라는 또다른 고려 요인이 있는데 비해 통일.외교.안보는 전적으로 '문민정부' 자체의 실책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바닥상태까지 악화됐다.

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 고 선언했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李仁模) 를 북한으로 보냈던 金대통령이 취임 1백일 회견에서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는 악수할 수 없다" 고 나서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94년 6월 정상회담 합의로 해빙을 맞은 것도 잠깐, 7월8일 김일성 (金日成) 주석의 사망과 이른바 조문파동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 되버렸다.

이후 북.미 제네바 합의, 북한 붕괴론 논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대북 식량지원 등 굵직한 현안을 둘러싸고 냉탕 (강경정책) 과 온탕 (유화정책) 을 오가는 정책 혼선이 되풀이됐다.

어쨌든 이후 북한에 쌀을 지원키로 하면서 남북관계가 풀리는 듯했으나 그마저 극적인 연출효과를 기대하다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6.25 발발 45주년인 95년 6월25일 쌀 2천t을 실은 '시아펙스' 호는 총리까지 동원된 환송행사를 마친 뒤 비내리는 동해항을 출항했다.

그러나 인공기 게양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얼어붙었다.

국내적으로는 지방선거 득표를 의식해 급조한 '정치쇼' 라는 비난이 일었다.

외교분야도 마찬가지. 외교정책 전문가들은 金대통령을 가장 '비외교적인 대통령' 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검증은커녕 전혀 앞뒤가 재어지지 않은 정책이 국정 최고책임자의 입을 통해 먼저 흘러나오는 아찔한 상황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독도문제와 관련, 일본에 대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고 언급, 외교문제로까지 번질 뻔한 것은 대표적인 경우다.

대미 (對美) 자동차 협상 주도권을 둘러싸고 외무부와 통산부가 알력을 빚거나 외무장관 공노명 (孔魯明) 씨가 하루아침에 납득할만한 이유없이 경질됐던 점도 흔들리는 외교를 보여준 것이다.

국방분야는 사조직의 발호와 정치논리의 오염 심화로 요약될 수 있다.

"YS정권은 국방정책의 전반적인 청사진이 없었다.

때문에 개혁이란 슬로건 아래 할 수 있는 건 군인들의 목을 치는 것 뿐이었다" 고 한 군사문제 전문가는 혹평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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