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노무현·김정일 만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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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All But Clinton, 줄여서 ABC. 클린턴이 쓰던 정책과는 모두 거꾸로 가겠다는 뜻이다. 좀 단순화된 표현이지만 지난 3년 동안의 부시 정부 대북정책은 ABC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축 발언, 북.미 양자회담 거부, 김정일 정권 제거 의지, 그리고 경수로사업 중단이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부시 정부가 지난달 6자회담에서 핵 문제에 관한 대북 태도를 완화했다. 부시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선언하면 한국.중국.일본.러시아가 수만t 규모의 중유를 지원하고, 미국은 북한에 "잠정적인" 안전보장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약속한 날부터 3개월 안에 핵시설의 동결과 해외반출 준비를 끝내라는 조건을 달았다.

*** 체제보장만으론 충분치 않아

미국의 제의는 북한을 핵무기 개발 포기로 유인하기에 충분한 것인가.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세 사람의 의견을 e-메일로 들어봤다.

셀릭 해리슨은 미국의 제의는 미국이 주겠다는 것에 비해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에서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포함된 약속을 선언해야 북한이 수락할 것이다." 돈 오버도퍼는 미국의 제의는 새로운 북.미 협상의 첫걸음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흥미로운 말을 했다. "행정부의 일부 인사는 북한이 미국의 제의를 즉각 거부할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은 현명하게도 적어도 아직은 미국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생어는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북한의 안전보장은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어는 이렇게 말했다. "신보수파는 미국에 의한 북한의 안전보장을 엄격하게 제한하려고 한다. 몇몇 관리는 미국이 김정일 정권을 항구적으로 받혀주겠다고 약속하는 데 반대한다고 내게 말했다."

부시 정부는 당분간 김정일 정권의 존속을 '감내(Tolerate)' 한다는 데까지 접근해 왔다. 그러나 부시 정부에는 핵의 완전폐기에서 국교정상화와 평화협정에 이르는 포괄적인 북한 정책이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보장의 선언은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이 아니다. 북한은 핵의 완전하고, 검증되고,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를 국교정상화와 평화협정까지 시야에 둔 미국의 포괄적인 북한 정책의 틀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김정일 회담이 하고 싶은 청와대와,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서울로 불러오지 못해 안달인 열린우리당은 부시 정부가 북핵 문제에만 매달릴 뿐 북한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는 현실을 충분히 음미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거나 가진 척하는 것은 미국과 수교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는 포기할 수 없는 생존전략이요, 사활이 걸린 협상카드다. 그것을 포기시킬 유인책이 우리에게 있는가.

공은 아직도 미국의 코트에 있다. 평양 가는 버스는 워싱턴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 부시의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서울에 온다. 그녀에게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의 차이를 교육하고 북한 문제 밖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듣게 설명해야 한다. 핵 문제 해결은 북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일부일 뿐이다.

*** 공은 아직 미국 코트에 있어

노 대통령이 핵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겠다는 부시의 언질을 받고 김 위원장을 만나지 않는 한 정상회담을 몇 번 해도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의 합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셀릭 해리스에 따르면 부시 정부 안에서는 9월의 6자회담에서 북한에 제시할 유인책을 놓고 내부투쟁이 진행 중이다. 그것은 한국이 미국을 설득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미리 생각해 둘 문제가 또 하나 있다. 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수만, 수십만 군중이 태극기와 인공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에 열광하지 않을까. 촛불시위와 반미감정 이후 김 위원장에 대한 남한 사회의 정서가 역전되고, 간첩이 민주투사로 대접받는 사회 아닌가. 김 위원장 답방은 이런 사태까지 고려하면서 추진할 일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