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후박나무 잎새 하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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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경림(1947~ ) '후박나무 잎새 하나가' 전문

후박나무 잎새 하나가 내 사랑이네
저 후박나무 그림자가 내 사랑이네
그 흔들림 너머 딱딱한 담벼락이 내 사랑이네
온갖 사유의 빛깔은 잎사귀 같아
빛나면서 어둑한 세계 안에 있네

바람은 가볍게 한 생의 책장을 넘기지만
가이없어라 저 읽히지 않는 이파리들
그 난해한 이파리가 내 사랑이네
사이사이 어둠을 끼우고 아주 잠깐
거기 있는 나무가 내 사랑이네
흔들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저 후박나무!
넙적한 이파리가 내 사랑이네
그 넙적한 그림자가 내 사랑이네



학생들에게 주변의 나무를 세어 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수십 종의 잎사귀를 붙여오거나 수백 그루가 넘는 나무의 통계를 내오기도 했다. 단 한 명만이 나무를 셀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찾아갔던 한 그루 나무에 대해, 끝내 해독할 수 없었던 그 이파리와 그림자에 대해 썼다. 마침내 그 나무가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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