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겸재전, 그래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사대부부터 하층민까지 그의 그림이 안 걸린 집이 없을 정도로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 영조(1694∼1776)는 평생 그를 이름이 아니라 호로 부르며 스승으로 예우했다. 우리 산천의 요체를 추출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화면을 구성,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진경산수화법을 개척했다. 바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다.

인왕산 기슭, 지금 주소로 서울 청운동 52번지를 그린 ‘청풍계(淸風溪·58.8×133.0㎝)’. 64세 겸재의 대담하고 호쾌한 필치가 돋보이는 대표작이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올봄 정기전 주인공은 겸재다. 17∼31일 2주간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화파전’을 연다. 겸재 진품 80여 점을 비롯해 조선 후기 문화 르네상스를 이끈 진경시대의 명품이 120점 가까이 나온다.

66세 에 그린 화첩 ‘경교명승첩’ 중 ‘압구정(押鷗亭·31.0×20.0㎝)’이다. 20세기 고층 아파트숲과 달리 18세기 압구정은 남산을 뒤로 하고 한강변에 자리잡은 ‘갈매기와 가까이 사귀는 정자’였다. [간송미술관 제공]

◆일곱번이나 전시 주인공 된 겸재=우리 서화의 보물창고인 간송미술관에서도 으뜸가는 소장품을 꼽자면 단연 ‘겸재 컬렉션’이다. 겸재 작품을 다수, 그것도 대표작들로 엄선해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971년 ‘겸재전’으로 미술관 첫 전시를 시작해 81년 ‘진경산수화전’, 85년 ‘진경시대전’ 등 겸재 관련 전시만 올해로 일곱 번째다. 1년에 딱 두 번 소장품을 공개하는 이곳에서 일곱 번이나 전시 주인공이 된 인물은 겸재뿐이다. 이전 전시와 다른 특징이라면 심사정·김홍도·신윤복 등 그를 따른 후예들까지 아울렀다는 점이다.

숙종 2년 한양 사대부가에서 태어난 겸재는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그 해에 ‘기사환국(이른바 장희빈 사건)’으로 스승이 역적에 몰리는 위기에 처한다. 벼슬길에 나갈 수 없으니 그림길로 나섰다. 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다시 과거 응시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41세에 천문학 겸교수로 등용되기까지 번번이 낙방했다. 덕분에 우리는 귀한 화가 하나를 얻게 됐다. 장기간 과거 공부를 한 만큼 그는 주역에 능통했다. 뛰어난 필력에 주역 원리에 따른 화면 배치, 중국 땅에서도 그를 인정했다. 중국서도 그의 그림이 고가에 팔려 역관들이 겸재의 그림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그림의 성인’이라 불리는 겸재=이미 30대에 당대 인기 화가로 자리잡았지만 진경산수화법을 확립한 전성기는 60대다. 우쭐하지 않고 최고를 향해 자신을 단련한 결과다. 기준작이라 할 수 있는 정점은 64세에 그린 ‘청풍계(淸風溪)’.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인 서울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다. 인왕산 특유의 잘생긴 흰 암벽을 대담하고도 장쾌하게 그렸고, 거친 붓으로 빠르게 버드나무·소나무·느티나무를 훑었다.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있었던 66세 때의 화첩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역시 인왕산·아차산·양수리·송파나루·압구정 등 서울 일대의 실제 풍경을 담았다. 36세에 갔던 금강산에 72세 때 다시 찾아가 진경산수를 완성했으니 그 집념도 인정할 만하다. 70대 중반에는 대상을 자기 마음속에서 마음대로 상징화해 추상에 가깝게 그려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그를 감히 ‘그림의 성인(畵聖)’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온 보편적 기법을 평생에 걸쳐 벼려 이상적으로 응용해 우리 미감으로 우리 그림을 그려 동양화법을 완성한 이”라고 평가해서다.

봄은 짧고 간송의 전시는 더욱 짧다. 지난해 가을 신윤복의 ‘미인도’ 등 조선 서화 명품이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 설립 70주년 기념전’엔 2주간 20만 인파가 몰렸다. 올해도 서둘러야겠다. 전시기간 중 무휴, 입장료 무료. 02-762-0442.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