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없는 협조융자 금융자율화 걸림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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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대마불사 (大馬不死)' 의 비뚤어진 신화가 되살아날 기미다.

최근 잇따라 이뤄진 대형 협조융자의 조건을 따져보면 은행들이 부실화된 대기업을 오히려 우대해주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은행들은 이들에 협조융자라는 이름으로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정상적인 기업보다 오히려 낮은 금리를 받고 담보도 잡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대기업 부도를 막아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에 따르느라 은행들이 원칙없이 기업에 끌려다니듯 협조융자를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뉴코아.신호.한화그룹 (2차) 의 경우 신용등급이 낮아 담보를 잡아야 하는데도 은행들은 신용으로 긴급대출을 일으켜줬다.

사정이 워낙 급해 담보를 챙길 여유도 없었고 기업측도 내놓을 담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해태.진도.한화 (1차).고합.동아건설.신원의 경우 부동산.국공채.주식 등을 담보로 냈으나 대출규모에도 못 미쳤다.

보통 대출금의 1백30%에 해당하는 담보를 잡는 것이 은행 관행이다.

금리조건도 대부분 기업에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의 요구에 따른 고금리 상황에서 연 20% 이상의 대출금리를 내고 있는 곳은 신호.한일합섬.동아건설 등 3곳 뿐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연 14~15%의 낮은 금리를 적용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협조융자를 받아낸 해태는 연 13.5%로 최우량기업 못지않은 이자만 내고 있다.

요즘 정상적인 기업들도 은행에서 대출받으려면 부동산을 담보로 잡히고도 최소 연 17~20%의 이자를 내야 한다.

이에 비하면 부실화된 기업에 대한 대출조건이 형평에 맞지 않는 셈이다.

또 협조융자를 받는 기업들은 한결같이 계열사 매각.부동산 처분.인원정리 등 자구계획을 발표했으나 부동산경기 위축 등으로 일정에 맞춰 딱딱 집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에 대해 은행은 긴급구제의 성격에 초점을 두다보니 원칙보다는 기업의 부담능력을 고려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용이 낮으면 비싼 금리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매달리다 보면 지원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은행 관계자는 "규정에만 따르면 대출이 아예 불가능하고 그나마 기업을 살리려면 대출조건을 완화해줄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금융계에서는 건당 수천억원 규모의 대형 협조융자가 얼마 뒤 또다시 은행의 집단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뉴코아의 경우 은행들이 당초 10일간 신용으로 긴급대출을 제공한 뒤 부동산담보를 잡고 일반대출로 전환키로 했으나 그전에 화의 (和議) 를 신청하고 부도를 내는 바람에 대출금이 지금까지 연체되고 있다.

협조융자가 화의신청 시점을 며칠 더 연장해줬을 뿐 회사갱생에는 아무 역할을 못한 셈이다.

이와 관련, 정지태 (鄭之兌) 상업은행장은 퇴임 회견장에서 "기업이 융자를 받아 살아날 것이냐 여부를 잘 판단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며 무원칙한 협조융자를 경계했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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