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입김 사라진 은행들 "자율 걸음마 겁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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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자율화라는 게 말이 쉽지 막상 하자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한 시중 은행장은 정기주총에서의 임원인사를 놓고 고민이 태산같다고 말한다.

종전 관행대로 한다면 고민이고 뭐고 할 게 없다.

위에서 내려준 '지침' 이나, 보이지 않는 '줄' 대로 맞추면 됐기 때문이다.

과거 은행 인사가 정치권의 실세 (實勢) 나 재경원의 입김에 좌우됐던 것은 금융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금융가에서는 이번 인사를 앞두고도 일부 행장이나 임원후보들이 새 정부 실세들의 주위를 적잖이 기웃거렸고 외부의 전화도 꽤 걸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은행인사에 개입말라” 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위' 와 '줄' 이 한꺼번에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말 그대로 자율적으로 해야할 판인데 자율의 경험이 없는 은행들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누구도 선뜻 나서 '모범사례' 를 보이려 하지 않는 게 문제다.

만일 정말 자율적으로 임원인사를 했다가 나중에 큰코 다치지 말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 정부의 대규모 출자로 국책은행이 된 서울.제일은행이 차라리 부럽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어차피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많은 임원이 물러나게 돼있는 마당에 누구를 자를 지에 대한 고민을 정부가 떠안게 됐으니 속 편하지 않겠느냐는 것. 이번에 임기가 만료되는 은행임원은 행장 10명을 포함해 1백7명. 이 가운데 특수은행과 일부 주인있는 은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은행들이 '자율인사 숙제' 를 떠안고 끙끙 앓고 있다.

통상 은행장과 감사는 비상임이사회의 추천으로, 나머지 임원은 은행장 추천으로 주총에서 선임된다.

그런데 은행에 주인이 없다 보니 이 과정에서 여기저기 외부 입김이 작용해온 것이다.

문제는 그 입김 마저 사라진 마당에 누가 과연 자율인사의 책임을 지겠느냐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외부 간섭이 없다면 현직 은행장의 의도대로 주총이 진행될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행장의 전횡을 견제할 장치가 없다.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지만 이번 은행주총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번 주총은 주주의 견제도 없고 관치와 외부 압력이 빠진 공백상태에서 처음으로 은행장들의 자율능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양원근 (梁元根) 연구위원은 “일단 외부 영향력이 완전히 차단된 만큼 은행들이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율화의 새로운 모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이라고 진단한다.

이번 주총의 초점은 ▶외환위기와 관련된 임원의 문책 ▶적자결산 등 은행 부실경영에 책임있는 임원의 문책 ▶임원수의 축소 등에 맞춰지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책임을 묻고 몇 사람을 줄여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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