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사돈간의 송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양반일수록 멀리 떨어진 곳의 가문과 혼사를 맺는 이른바 '원혼 (遠婚)' 풍습이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이 풍습은 지리적.풍토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열성 (劣性) 요인끼리의 결합을 예방하려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원칙처럼 굳어지면서 사돈은 으레 불가근 (不可近) 의 존재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가장 지체가 높은 양반 가문은 최소한 1백리 이상 떨어진 가문과의 혼사를 원칙으로 삼았으며,가문의 품격에 따라 타도 (他道).타군 (他郡).타면 (他面)에서 자란 며느릿감이나 사윗감을 골라 혼사를 맺었다.

이런 풍습이 불문율로 굳어지면서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 거나 '거북하기가 사돈네 안방이다' 는 따위의 속담이 생겨났다.

바로 사돈간에 지켜야 할 거리를 암시하는 속담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지리적 여건은 아예 무시되고 양가 (兩家) 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조건만이 성사 요건으로 작용하는 게 보통이다.

결혼당사자의 생각이야 어떻든 서로의 수준이 비슷하게 어울리거나 최소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어야만 '어울리는 사돈' 이 된다는 게 보편적 사고방식이다.

바꿔 말하면 서로의 이해타산이 평형을 이뤄야만 만족스러운 혼사가 된다는 이야기다.

'아무개와아무개가 결혼한다' 는 사실보다 '어떤 가문과 어떤 가문이 사돈을 맺었다' 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도 달라진 혼속 (婚俗) 이다.

그렇게 되니 막상 당사자들은 서로 지극히 사랑해 결혼하기를 갈망하는데도 양쪽 가문의 '수준' 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성사되지 못하는 예가 흔하다.

돈과 권력은 결혼을 성사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등장했고, 6공 때는 최고권력자와 사돈을 맺은 어느 재벌의 이권 (利權) 문제가 세간에 구설수를 뿌리기도 했다.

이쯤 되면 오늘날의 혼사는 비인간화의 전형인 셈이다.

사돈을 맺었다가도 이해타산이 어긋나면 그 관계를 파기하기 일쑤고, 부모의 뜻만을 좇아 결혼했다가 이런저런 문제로 헤어지는 젊은 부부도 많다.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주식의 소유권을 둘러싼 '사돈간의 법정공방' 도 그런 세태의 한 단면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쪽 아버지들에게 모두 상처만 남긴 이 싸움이 자식 부부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자못 궁금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