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 칼럼]김영삼대통령만의 잘못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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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달 12일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강경식 (姜慶植) 전 부총리, 김인호 (金仁浩) 전 경제수석과 만찬을 나누다가 '네 탓이오' 공방을 벌였다는 내용을 한 시사주간지 최근호가 전하고 있다.

임창열 (林昌烈) 경제부총리와 김영섭 (金永燮) 경제수석도 배석한 이 만찬에서 金대통령이 자신은 IMF사태의 주범이 아니며 姜전부총리와 金전수석에게 책임이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하자 金전수석은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한 날짜가 적힌 일지까지 내밀며 반박해 金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정확한 것인지는 가늠할 길 없으나 사실이라면 나라 꼴도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외부세계에 망신거리가 또 하나 생긴 셈이다.

이 남부끄러운 소문이 金대통령의 귀에 들어간 것인지 5일자 조간신문에는 金대통령이 "외환위기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인 나에게 있다.

앞으로 청와대는 외환위기 책임과 관련한 어떤 언급도 하지 말라" 고 했다는 청와대 발표내용이 일제히 실려 있다.

감사원이 이미 특별감사에 나섰고 앞으로 또 청문회도 있을 것이라니 과연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오판 (誤判) 했으며, 대응을 늦게 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는 실은 부차적 문제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일이 그 지경이 되기까지 일반 사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내는 것이다.

판단 미스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金대통령의 지적 허약성과 철학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그런 개인적 결함이나 취약성보다는 행정의 오만과 독선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일부 전문기관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1년전, 2년전부터 논의되고 정부에 보고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 사이에서만 논의됐을 뿐 일반 사회에는 물론 학계에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내용의 공개는커녕 불필요한 패닉을 막는다고 외부에는 철저히 비밀로 해왔다는 것이 관리들의 고백이다.

우리 사회의 지적 두께도 이제는 다른 나라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 외환실태가 진작 사회에 널리 알려졌더라면 오늘과 같은 최악의 사태를 낳기 전에 여러가지 적절한 처방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만이 모든걸 잘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관리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비밀주의가 끝내 파국을 낳고 만 것이다.

IMF사태가 시작됐던 지난해 12월초 내한했던 루디거 돈부시 미MIT대 석좌교수도 "한국 정부는 모든 것을 비밀로 덮어두고 군대와 같은 수직적인 조직 속에 휩싸여 있으며 권력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견제가 없어 자기 혁신이 사라져버린 것이 근본문제" 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또 IMF팀이 며칠만 늦게 왔더라도 한국은 꼼짝없이 국가부도 상태가 됐을텐데 그런 사정마저 국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정도로 한국정부는 불투명했다고 개탄했다.

국정감사나 청문회를 해서 구체적으로 어느 누가 얼마만큼 잘못을 했는가 밝혀내는 것도 필요한 일이긴 하다.

여기에는 김영삼대통령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책임을 밝혀 지탄을 하는 것은 감정풀이는 돼도 한국행정의 문제, 한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잘못을 밝혀내는 것 이상으로 과연 어떤 제도, 어떤 관행이 관료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비밀주의를 낳는지를 밝혀내고 그를 타파할 방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몇몇 사람의 실수나 판단착오에 의해 전체 사회나 전 국민이 함께 불행해지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는 일이다.

정부가 투명하고 민주화돼 있다면 개인의 판단착오나 실수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고 견제할 수 있다.

햇볕이 비치는 곳에서는 버섯이 자라지 않는다.

두번 다시 이번 환란 (換亂) 과 같은 국가적 불행을 겪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공직사회를 외부에 완전 공개하는 제도개선을 이뤄내야 한다.

공직사회를 햇볕에 노출시키는 것 이상으로 좋은 위험예방 장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제도와 풍토의 책임도 함께 추궁하는 슬기가 필요하다.

유승삼〈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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