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고 안쓰면 나라살림 더 안풀린다…지나친 소비절약 존립기반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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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허리띠를 조이다가 허리가 부러질 판이다.

과도한 내수 (內需) 위축이 성장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계가 소비를 절약하고, 기업이 투자를 줄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경제는 더 깊은 불황의 골로 빠지게 된다.

IMF와 선진국들이 한국에 융자를 해주면서 기대하던 것은 거품을 빼고 성장잠재력을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경제에는 IMF처방전의 부작용만 증폭돼 나타나 IMF도 당황하는 눈치다.

◇ IMF도 이렇게까지 한국경제가 어려운지 몰랐다 한국을 돕기로 하면서 IMF가 내세운 조건은 경제교과서대로였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긴축을 해 외채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었다.

돌아다니는 돈을 줄이고 금리를 높이면 기업이 투자를 줄일 것이고, 여기에 정부도 나라살림을 줄이면 나라 전체의 씀씀이 (내수)가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입에 쓰던 외환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금리는 또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는 외국돈이 많이 들어오게 해, 환율이 안정되고 따라서 물가안정을 바탕으로 수출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수입은 줄고 수출이 늘어나면 결과적으로 국제수지가 개선되고 외채갚기도 쉬워질 것을 바랐다는 얘기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국제수지가 개선되고는 있으나 그것이 수출활력 회복보다는 수입의 과도한 위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경쟁력에 관한 한 상황은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외환이 들어오지 않아 높은 환율이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는 수입요인에 따른 물가상승으로 나타난다.

또 고금리 때문에 투자를 줄이다 보니 생산성 향상을 위해 쓰는 돈조차 줄이게 된 것이다.

한국경제가 회생하라고 마련한 IMF금융조건이 오히려 한국의 외채상환능력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얘기다.

◇ 소비절약이 고실업을 낳고 있다

IMF금융조건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불황이 더 심해지게 돼 있었다.

문제는 불황이 심해질 것이라는 말에 지레 놀라 너도나도 살림을 줄이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기업은 고금리도 고금리지만 앞으로 한동안 경기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대기업의 구조조정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엄청나게 투자를 줄이고 있다.

가계도 마찬가지다.

임금깎기와 일자리줄이기가 다반사가 돼 가고 있는 가운데 "어려움은 이제 시작일 뿐" 이라는 말에 놀라 줄이던 허리띠를 더 줄이고 있다.

불황에 내수위축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다 보니 생산기반을 무너뜨리고 이는 실업증가와 소득감소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각한 내수침체를 초래하는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 내수위축과 금융마비간에 악순환 고리가 생겼다 금융부문에 들어가면 내수위축은 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돈의 흐름이 얼어붙어 가뜩이나 움츠린 경제가 아예 서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말부터 시작해 내수위축과 금융경색간에 악순환 고리가 생기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부도기업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대출을 꺼리고 또 이미 꾼 돈조차 빨리 갚으라고 성화다.

문제는 이렇게 발생한 금융경색 때문에 기업이 규모를 더 줄여야 한다는 데 있다.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땅과 사업을 내놓고 또 사람을 더 줄일 수밖에 없다.

이들 자산이 제 값에 얼른 팔리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이 불경기에 새로 땅을 사고 새 사업을 시작할 재력과 뱃심을 가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과는 자산가격의 폭락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소위 자산 디플레 (자산가격의 하락이 불황으로 이어지는 현상)가 야기되는 것이다.

자산가격이 내려가니 자산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들어 금세 내수위축으로 연결된다.

자산 디플레의 더 큰 위험은 그것이 금융경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담보로 잡은 자산가격이 내려가니 대출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내수위축 - 금융경색 - 자산 디플레간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실제로 물가가 오르고 실업이 발생했을 때 내수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겁을 먹고 가계와 기업, 정부가 너도나도 필요 이상 소비.투자를 줄이면 불황을 필요 이상으로 더 길고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허리띠를 조이되 허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또 IMF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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