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미국의 생색내기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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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취임 직후 방미 (訪美) 할 계획이라고 한다.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미국과 인연이 깊었던 金당선자가 취임후 서둘러 미국을 찾는 건 자연스럽다.

다만 한국 새 지도자의 가슴 속에 미국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으며 또 미국은 당선자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대마도 앞바다에 수장 (水葬) 될 목숨을 구해준 나라, 대선과정에서 은근히 金후보에게 친근감을 내비쳤던 미국에 대한 고마움일까. 아니면 망명 시절 누차 미국 조야 (朝野) 의 문을 두드렸건만 한국 군사정부와의 마찰을 우려해 문전박대했던 나라에 대한 서운함일까. 혹은 광주사태 당시 미국의 석연치 않았던 태도에 대한 의구심일까. 따지고 보면 아시아 지도자들 가운데 미국에 신세진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 친미론자 (親美論者) 는 아니다.

베나지르 부토 전파키스탄총리나 코라손 아키노 전필리핀대통령이 미국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대국의 오만에는 서슴지 않고 대든 지도자들이다.

이에 비하면 金당선자의 미국관은 신중한 용미론 (用美論)에 가까울 듯 싶다.

국익을 위해 힘있는 미국을 가급적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金당선자는 대선 직후 유난히 많은 미국인들을 만났다.

금융위기 극복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지만 만난 이들마다 당선자의 개혁의지에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金당선자를 지켜본 미국인들의 머리 속엔 두가지 생각이 스며 있다.

“金당선자는 미국에 신세진 사람이다.”

“평생 민주화투쟁을 했지만 권위적인 구석이 있는 지도자다.”

얼마전 방한 (訪韓) 해 金당선자를 만났던 리처드 홀브룩 전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지난해말 뉴욕 타임스지 기고에서 80년대초 당선자의 목숨을 건지는 데 자신의 활약상을 공개했다.

이어 리처드 앨런 전백악관 안보보좌관도 별도기고를 통해 생색내기에 동참했다.

지난주 워싱턴을 방문했던 우리 국회사절단은 미국 조야로부터 金당선자에 대한 많은 덕담 (德談) 을 들었다.

하지만 차기정부는 김영삼 (金泳三) 문민정부 출범 당시 미국이 보인 반응도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한.미 관계의 장래는 다분히 우리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 지난 정권의 교훈이다.

한국 지도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색내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金당선자의 실속있는 용미론은 지난날 미국에 대한 신세와 유감, 그리고 의구심을 모두 떨쳐버릴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길정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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