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新官治' 볶이는 은행장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은행장들은 요즘 날마다 시험을 본다.

시험과목은 '수출금융.중소기업 지원실적' , 감독관은 지난달 명동 은행회관 건물에 설치된 금융애로대책단이다.

주요 평가항목중 하나가 '은행장 활동상황' 이다.

지난달 초부터 결과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 당선자에게 즉각 보고된다.

은행장들의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다.

A은행장은 지난달 30일 경인지역 2백50여개 지점장이 모인 자리에서 일장훈시를 했다.

“정부에서 우리 은행을 살려줬으니 정부 시책을 존중해야 한다.

중소기업.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 는 당부였다.

B은행장은 하루 일정이 끝나는 오후6시 이후 무작위로 정한 점포를 급습 (?) 한다.

사전 연락은 물론 방문순서도 따로 없다.

지점장들은 매일 기업 대출실적을 만들어 놓고 은행장을 기다린다.

직원들은 죽을 맛이지만 효과는 만점이라는 자체 평가다.

이 정도는 약과다.

C은행장은 “중소기업 대출을 독려해도 직원들이 전혀 말을 듣지않아 지원실적을 인사에 반영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고 씁쓸하게 웃었다.

D은행장은 임원회의에서 차라리 역마진을 감수하고라도 기업에 대한 대출 우대금리를 1% 포인트 가량 내리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단지 지원성적을 올리기 위해 오후시간을 송두리째 할애하고 그것도 부족해 2~3일씩 지방 출장을 가는 은행장들도 많다.

원래 몸이 두세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는 은행장들이 지점이나 거래기업 방문에 많은 시간을 들이다보니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은행 내부에서는 이 때문에 분초를 다투는 의사결정이 늦어진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차기 당선자가 직접 보고받는다' 는 대목에서 할말을 잊는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뿐이다.

외화고갈로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들여야 할 상황에 금융기관이 수출지원에 총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기업이 살아야 은행도 사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강력하지만 은행들도 할 말이 있다.

우선 지원할 만한 기업이 눈에 안띈다고 한다.

돈 달라는 아우성이 높은 곳일수록 부도위기에 몰려있다는 것이다.

부실여신을 문제삼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무조건 돈을 내주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겠다는 푸념이다.

과연 은행때문에 수출이 안되는 것이냐는 반문도 거세다.

은행들이 신용장을 외면해 수출이 안된다지만, 수출품목이 선적되자마자 은행이 해당기업에 미리 돈을 내주는 신용장 네고라는 것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시행되던 70년대 초반의 산물일 뿐 정상적인 국제관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출환어음을 상대 수입업체에 보내 결제대금이 들어온 뒤에 수출대금을 결제해주는 추심방식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원실적 평가도 은행에 따라 자산규모.자산구조가 천차만별이니 만큼 정확한 상대평가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겉으로 표현이야 못하지만 불만이 적지 않다.

수출증대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곤 있다 해도 결국은 관치금융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네가 하면 관치, 내가 하면 개혁이라는 말이냐' 는 비아냥도 들린다.

이 가운데 비상경제대책위는 지난 1일 조흥.신한.동남.대동 등 4개 은행에 최하위 등급인 C를 줬다.

해당 은행들은 비상이 걸린 눈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은행의 시각은 복잡했다.

B은행 관계자의 말. “은행장들이 외압을 무시할 만큼 현명했거나 아니면 올해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장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