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뚝심을 고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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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제2보 (18~36)]
黑.안조영 8단 白.이세돌 9단

많은 대학교수들의 스승이었던 한학자 신호열 선생은 노국수 중의 한분이었다. 한때 노사초 국수를 따라 전국을 유랑했고 훗날 프로2단의 자격을 받았지만 시합에 나간 적은 없다. 하지만 바둑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말년에 댁으로 찾아가니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 무거운 바둑판을 번쩍 안아들고 나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바둑은 단순함이 요체가 아닐까"라고 선생은 말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것을 직관으로 꿰뚫어 단순하게 만드는 것…. 비금도 천재 이세돌9단에겐 이 능력이 있다. 때때로 무모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척척 나아가는 쾌속의 돌파력이 있다.

18로 하나 젖혀두고 20으로 차단한다. 이제 흑▲가 살아가야 할 차례. 하지만 안조영8단은 쉽게 손을 뻗지 않는다. 본래의 계획대로 '참고도'흑1로 넘어가면 백2,4로 끊는 수단이 있다. 검토실에선 못둘게 없다는 주장이지만 안조영은 A, B 두군데의 맛이 고약해 판이 엷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느낀다.

그 후에도 몇번의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검토실에선 아쉬움에 가득찬 비난(?)이 쏟아졌다. 흑▲ 한점은 눈이 번쩍 뜨이는 알토란 같은 현찰이다. 무릇 바둑의 고수로써 이런 실리에 둔감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타고난 보수주의자' 안조영은 판이 다급하게 출렁이며 알 수 없는 길로 무한질주하는 게 싫다. 그런 변화나 싸움이 싫다. 바른 자세로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그의 체질이고 방식이다. 37로 지키고 결국 38로 잡혔다. 초반의 화두였던 흑▲ 한점을 내주고 끝끝내 두터움을 고수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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