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목숨을 앗아간 병은 뭐지요?” “인생이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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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13면

먼저 짚어둘 게 있다. 하드보일드를 시간 때우기로 읽겠다면 이 작가는 피하는 게 좋다. 오락용으로는 너무 무겁고 비극적이다.
로스 맥도널드(1915~83)는 그런 작가다. 굴절된 가정의 비극을 통해 미국 사회의 병리를 고발했다. 그가 창조한 탐정은 루 아처. 모두 18편의 장편에 등장해 1인칭 시점에서 사건을 파헤친다.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질문하는 탐정 ‘루 아처’

아처는 영웅이 아니다. 1914년 6월 2일 출생, 롱비치에서 자라나 10대 땐 비행 청소년, 개과천선해 경찰이 되지만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퇴직해 탐정을 개업했다는 설정이다.

캐릭터의 존재감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와는 비교가 안 된다. 작가의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아처는 멋을 부리거나 폼을 잡지 않는다. 오직 주변 인물들에게 정신분석의처럼 세세한 질문을 집요하게 해댄다.

맥도널드는 아처를 ‘질문자’로 규정했다. 그래서 책은 온통 따옴표투성이다. 반복되는 문답 속엔 건조한 사실관계뿐 아니라 광기와 살의도 담겨 있다. 그런 퍼즐 조각에서 진상을 밝혀내는 게 아처의 일이다. 호쾌한 야외 액션은 아예 기대하지 말자.

작품마다 사건은 다르지만 패턴은 같다. 현재라는 굳은 지면에 조금씩 균열이 생겨 과거라는 지층 깊숙한 곳까지 갈라지는 사건들이다.

작가가 꼽은 최고 걸작은 『소름』(1964)이다. 신혼 첫날 잠적한 신부가 며칠 뒤 피투성이가 돼 돌아온다. 정신착란에 빠진 듯 “사람을 죽였다”고 울먹이며. 남편의 부탁으로 아처는 과거와 현재의 살인 사건들 사이에 어렴풋한 인과관계를 추적한다. 결국 그가 밝혀낸 것은 제목 그대로 소름 끼치는 진상이다. 뒤틀린 애정, 추악한 질투, 편집증적 독점욕….

아처는 인간을 죄인으로 본다. 돈이 범죄의 동기라곤 하지만 근본적으론 인간이 문제다. 작가의 인간관이 그렇다.

“악이란 개개인의 내부에 숨어 있는 거야. 돈은 그 핑계에 불과하지. 사람들은 원래 지녔던 가치들을 잃었을 때 맹목적으로 돈에 매달리는 거라네.”(『움직이는 표적』)
그래서 죄 많은 인생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내몬다. 『위철리 여자』(1961)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 여자의 목숨을 빼앗아간 병이 뭐지요?”
“인생이오.”
그런 인생에 아처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비록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소름』의 마지막 대사가 바로 그렇다.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소, 레티셔.”
사건이 잿빛이니 아처가 명랑할 리 없다. 늘 우울하다. 꿈을 잃은 지 오래다. 현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헤어나기 어려운 고독에 잠겨 있다. 『소름』의 배경 묘사는 그런 심리를 상징한다.

“밖은 안개가 짙었다. 축축한 안개 덩어리가 퍼시픽 포인트를 뒤덮었고, 도시는 바닷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평론가들은 맥도널드의 작품을 현대판 그리스 비극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그중에서도 『굿바이 룩』(1969)은 문학적 향기가 높다고 평가된다. 추리소설로는 최초로 뉴욕 타임스 북리뷰의 1면을 장식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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