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몸살앓는 지구촌 한인들]5.<끝>러시아·동남아 진출기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러시아와 동유럽.동남아 등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IMF 한파 (寒波) 를 일찍이 없었던 시련이자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러시아.동유럽은 전세계에서 한국 이미지가 가장 좋은 곳이다.

결코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며 뛰고 있다.”

모스크바의 진로루스푸드 현명철 사장은 한인사회의 새로운 분위기를 이같이 전했다.

러시아.동유럽의 한인들이 느끼는 IMF 한파는 다른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체감 한파는 요즘 섭씨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만큼 매섭기 짝이 없다.

이들 지역은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한국 기업.상품이 잘 나가던 곳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과거 한국의 30억달러 경협 제공에서 시작된 좋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지난 96년 컬러TV.VCR시장을 35% 가량 차지해 점유율 면에서 미.일을 제치고 1위 자리에 올랐다.

자동차 역시 시장점유율 10%대 (3위) 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위기는 그동안 쌓아 놓은 '공든 탑' 을 여지없이 흔들고 있다.

특히 미.일.유럽 등 경쟁국 업체들의 험담과 역선전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강한 생명력은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삼성전자 현창열 과장은 “1달러도 아깝다는 생각에 직원들이 요즘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일하고 있다” 고 말했다.

60~70년대 전세계를 맨발로 누볐던 '종합상사 맨' 들을 본받자는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해서다.

모스크바의 한국관과 TST.인터시그날.프라이스여행사 등 한국 교민들이 운영하는 업체들은 한국 상품 구매단 모집행사를 열었다.

그 결과 지난해말 1차 구매단이 한국을 찾았고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지역은 부산 등지로 떠나는 현지 보따리 상인들로 다시 북적거리고 있다.

지난 1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 두 명의 한일합섬 직원이 큰 짐보따리를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독신으로 현지공장에서 5년 동안 3천명의 근로자들과 나뒹굴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귀국해도 다닐 공장이 없어요. 구로.김해공장의 설비를 모두 뜯어 와 인도네시아 솔로공장을 지었으니….” 한일합섬측은 현지에 남은 12명의 한국 근로자들도 단계적으로 축소할 방침이다.

그러나 임금상승을 피해 80년대 후반 제3국 시장을 노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의 봉제.완구업체들은 수출경쟁력이 높아져 공장을 풀 가동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30대 그룹에 속하는 코린도 그룹은 승은호 (57) 회장이 70년 현지에 세운 회사. 한국인 3백명과 현지인 2만명을 거느린 이 그룹은 합판.신문용지를 생산하고 있다.

신문용지의 경우 인도네시아 국내시장의 75%를 장악하고 있으며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액이 7억달러를 넘어섰다.

미 현지법인의 출자로 필리핀에 진출한 아남산업. 지금은 필리핀 최대 수출업체로 자리잡았다.

수입에만 치중했던 필리핀의 대기업들이 페소화 폭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아남그룹 현지공장은 통화위기를 계기로 오히려 미래를 자신하고 있다.

“페소화 가치가 하락하는 만큼 수익성이 좋아지지만 한국 경제가 비명을 지르는 마당에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고….” 익명을 요구한 한 한국계 현지법인 관계자의 솔직한 표현이다.

모스크바·도쿄 = 김석환·이철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