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의 역습’에 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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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 플루가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생명체가 지구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문화평론가이자 중앙일보 고문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 역병 전파가 이 시대에 던지는 의미와 대책을 들어봤다. 다음은 이 전 장관의 발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세균·바이러스의 생존 환경이 바뀌면서 언제, 어떤 바이러스가 출현할지 모르는 세상이 됐다. 몇천 년 동안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바이러스를 이머징(emerging) 바이러스라고 한다. BSE(소해면상뇌증), 속칭 광우병도 초기엔 짐승 간 전염병이었는데 사람에게 나타났다. 에이즈(AIDS)도 마찬가지다. 수천 가지 바이러스가 있는데 언제 어느 것이 변종 바이러스가 될지 모른다. 이머징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데이터도, 대비책도 없어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비하기 위해 우선 한국도 세균·바이러스에 대한 국제 정보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미국은 이런 문제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대응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세균학자들과 정보를 공유한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출현했을 때 몇 개월 만에 바이러스의 특성을 알아내고 백신을 만들었다. 미국이 중심이 된 네트워킹에 들어가기 위해 ‘바이러스 외교’를 펼쳐야 한다.

둘째는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공개해야 한다. 전염병이 갑자기 퍼지면 언제나 백신 등이 부족하게 된다. 이를 고려해 누구부터 약을 줘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해놓아야 한다. 비상사태를 지휘할 국가지도층이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원 같은 사람들부터 줘야 한다든지 등의 원칙이 필요하다. 직접 병 치료를 맡은 방역반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1000명분이 확보된 상황을 가정하고 누구에게 줄 것인지 리스트를 미리 작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선순위를 결정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쓰게 된다. 첫 환자가 나오면 어느 병원으로 이송할지, 어디를 통제할지도 미리 정해놓고 도상작전도 해야 한다.

셋째는 전염병 명칭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결핵도 폐병·폐결핵·결핵폐 세 가지로 불린다. 용어에 따라 환자 대응이나 국민 인식도 달라진다. 광우병도 원래의 이름인 BSE로 불렀다면 공연한 심리적인 패닉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WHO가 정하는 대로 쓰는 게 가장 좋다. 나라 이름을 쓰면 해당 국가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돼지’를 넣는 것도 옳지 않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했다가는 양돈업자가 다 죽는다. 중립적인 학술용어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인권보호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신상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환자를 마구잡이로 다룬다면 누가 자발적으로 신고하겠나. 과학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 환자는 죄인이 아니다.

이어령 본사고문
정리=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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