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관 IMF특수 즐거운 비명…"싸고 오래즐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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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삼류극장을 기억하는가.

'삼류' 라는 말에 혹시 극장주들이 발끈할지 모르니 '재개봉관' 정도로 호칭하기로 하자. 개봉관을 순례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한물 간' 영화들이 다시금 무대에 서는 자리. 아니 '미불'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에 목말랐던 중고생들이 호기심을 은밀히 해소하던 곳. 때로는 용돈 궁한 대학생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학교 앞 재개봉관에서 단돈 2천원에 영화 두편을 보고 나와 인근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말끔히 비우던 그때. 그게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인데…. 요즘이야 이렇게들 살까. 초현대식시설을 갖춰놓고 이른바 '복합문화공간' 임을 자부하는 '일류극장' 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누가 일부러 변두리에 있는 그 음습한 '삼류극장' 을 찾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 곳이라고 끝내 볕이 들지 않을까. 요즘들어 감원바람에 등 떼밀린 실직자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말쑥한 양복차림의 30~40대 남자들. 신문을 말아쥐고 있는 모습도 대개 비슷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묻지 않는 게 좋다.

자칫 우거지상을 한 '3류인생' 으로 지레 짐작만 하지 마시길. 주말이면 예전에 보기 드물게 부부.연인들이 이어진다.

누가 동네 재개봉관 따위에 가서 주말 데이트를 즐기느냐고? 무슨 소리. IMF시대의 오락은 '싸고 오래가는' 것이 최고란 말씀. 4백~5백석 규모의 제법 큰 재개봉관은 낮 관객의 80%이상이 젊은층이다.

그러다 보니 개봉관에서 금방 간판을 내린 '스타십 트루퍼스' '페이스 오프' 등 인기 SF.액션물이 내걸린다.

먼저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잠시 기다렸다가 저렴한 가격으로 두개를 볼 수 있으니 일거양득. 한번쯤이라도 비디오방의 '폐쇄공포증' 에 시달린 경험자에겐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새로운 '경쟁력' 을 말하는데 있어 극장 주인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본래 존재이유가 있었다는 얘기.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홍제극장 강준태 (49) 사장의 '재개봉관 예찬론' 을 들어보자. “일단 4천5백원 내고 영화 두편을 볼 수 있으니 4~5시간은 너끈히 때웁니다.

아침에 와서 저녁까지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도 없고 난방 잘되니 따뜻하고. 보다가 싫증나면 휴게실에서 틀어주는 비디오까지 즐기고, 배가 고프면 컵라면 사먹으면 되구요. 방학때 갈데 없는 애들이 낮에 많이 오네요.” 아닌게아니라 휴게실 한구석엔 라면이 끓고 있다.

이쯤에서 재개봉관 감소추세는 멈춰서는 걸까. 아니면 농도짙은 성인에로물 전용극장화 현상도 주춤해질까. 어차피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제품은 사랑받기 마련. 겨울바람을 타고 들 낭보 (朗報) 를 기다리며….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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