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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어린 독재자의 ‘소명 의식’ 하늘은 히틀러를 응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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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는 히틀러에 대한 15번의 암살 시도 중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왔던 ‘발키리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1907~44)은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과 유럽을 파멸시키기 전에 그를 막기로 했다.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한쪽 눈, 오른손, 그리고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그는 독일사령부로 발령받으면서 비밀 저항세력에 가담,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옆 탁자 아래에 슈타우펜베르크가 숨겨둔 폭탄이 터졌다. 히틀러는 바지가 찢어지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상처는 거의 없었다. 몸을 기대고 있던 무거운 상판 덕분에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는 흥분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안도하는 듯했다. 그의 침착함은 무엇보다도 ‘기적적인 구원’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건을 계기로 ‘소명 의식’을 더욱 강화시킨 듯했다.

그날 오후, 예정대로 방문한 무솔리니와 함께 폭발 현장을 둘러보며 히틀러는 말했다. “오늘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보니 우리의 위대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의무가 내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이 전보다 더 강하게 듭니다.” 강한 인상을 받은 무솔리니가 한마디 보탰다. “이것은 하늘의 계시였군요.” 연합군의 공세로 전황이 불리해졌지만 히틀러는 ‘7월 20일 사건’에서 확인된 ‘섭리’를 믿었고, 깜짝 놀랄 만한 국면 전환을 믿었다. 9월 초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노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듬해 4월 13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다시 한번 섭리가 그에게 신뢰를 전하는 듯이 보였다. 측근들도 기분이 고조됐다. 안도·감사·신뢰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까지도 뒤섞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죽음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4월 29일에는 그 전날 무솔리니가 거꾸로 매달린 채 비참하게 처형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히틀러는 최후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30일 소련군이 가까이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부(情婦)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45년 5월 7일자 시사주간지 ‘타임’은 히틀러의 죽음을 커버스토리로 보도했다(사진). 얼마 전 장거리 로켓 발사를 성공(?)시켜 의기양양해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 섭리와 소명의식을 느꼈을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