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기억은 끈끈이 주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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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명희(1965~ ) '기억은 끈끈이 주걱' 전문

기억은 단단하다 손발을 옹송거린
호두껍질처럼 쉽게 무르지 않는다
끊어내려고 해도 이빨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은 싱싱하다 물을 뿌리면 되살아나는 배춧잎처럼 기억은 싱싱하다
뒤적여도 뒤적여도 숨이 죽지 않았다
기억은 튼튼하다 튼튼한 신발을 신고
뒤따라왔다 잠자리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았다
기억은 끈끈이 주걱 머리 속에 벌레가 바글거려도 끈끈한 주걱을 놓치지 않는 기억
그것은 끈끈이 주걱 끈끈이 주걱



지우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끊어내려 할수록 더 완강하게 들러붙는 '기억'이라는 짐승. 그러나 기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리 불러내려 해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망각'이라는 짐승인지 모른다. 파열되기 전에 깊이 처박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폐기된 진실. 그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대한 기억부터 되물어야 하리라, 기억보다 더 끈끈한 주걱을 들고.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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