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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키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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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여인 형상을 한 철제 상자에 넣는 형벌을 중세 사람들은 ‘처녀의 키스’라 불렀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들어간 사람을 기다리는 건 달콤한 처녀의 입술이 아니었다. 상자 안쪽엔 쇠꼬챙이가 수없이 박혀 있었다. 뚜껑이 서서히 닫히면 쇠꼬챙이가 몸을 관통할 것만 같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불지 않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 고문 도구의 정식 명칭은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철로 만든 처녀)’이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성에 있던 일명 ‘뉘른베르크의 신부(新婦)’가 제일 유명했다. 성 지하에 전설적인 16세기 고문 기술자 프란츠 슈미트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가 700여 명을 고문한 세세한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처녀의 키스’는 연원이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스파르타의 폭군 나비스가 이와 유사한 도구로 지주들을 갈취했다고 썼다. 돈 내놓길 거절하는 이에겐 “나의 아페가는 능히 그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부인 아페가를 닮은 철침투성이 형구를 들이댔다고 한다.

인류 역사는 ‘처녀’ 말고도 갖가지 고문으로 점철돼 있다. 잔학무도한 고문이 면면히 이어진 건 ‘설득’의 도구로서의 유용성 때문일 터다. 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데 공포와 고통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고 본 거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고문 파문도 그렇다. 알카에다 대원들에게 하루에 여섯 번씩 물고문을 가해 얻은 정보로 미국을 테러 위험에서 구했다는 게 보수파의 주장이다. 설사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해도 때가 어느 땐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목청을 높이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미국의 진짜 목적이 화풀이가 아니라 정보였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한국전 당시 미군 포로에 대해 중국군이 펼친 고도의 심리전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군사정보를 캐내려 무자비하게 미군들을 고문했던 북한군과 달리 중국군의 무기는 작문이었다. 미국을 비판하는 강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글을 쓰도록 유도했더니 나중엔 미군들 스스로 변해서 적극 협조하더란 얘기다.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원하는 걸 얻었으니 CIA보단 몇 수 위 아닌가.

민주주의의 맹주를 자처했던 부시 정권이 테러 범죄를 막기 위해 고문이라는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른 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공황 무렵 영국을 이끈 노동당 지도자 램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많은 범죄가 ‘국가를 위해서’란 미명 아래 행해졌던가.” 이 말이 현재진행형인 현실이 안타깝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