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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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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오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64주년이다. 충무공이 태어난 서울 건천(현재의 인현동)의 관할구인 중구에서는 이미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시작됐다. 현충사가 있는 충남 아산에서도 ‘제48회 아산성웅이순신축제’가 D-데이를 카운트하며 개막일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떠들썩함의 주인공인 충무공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 사연인즉 이렇다. 2002년 충무공의 15대 종손 이재국씨가 후사 없이 숨진 뒤 충무공의 가문, 즉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와 미망인이 된 종부(宗婦) 사이에 양자를 들이는 문제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갈등은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사업을 벌이던 종부가 진 빚 7억원 때문에 지난달 25일 현충사 경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고택 터가 경매에 부쳐지는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이틀 후 종친회는 긴급이사회를 열어 종부를 문중에서 퇴출시키기로 했다. 이에 종부는 충무공 탄신일 이전까지 어떻게든 빚을 갚아, 오는 5월 4일 2차 경매만큼은 중지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 물론 충무공은 사사로운 가연(家緣)에 얽어놓을 대상이 아니다. 그는 어느 한 문중 혹은 어느 일가의 충무공만이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의 충무공이다. 사실 충무공의 고택 터가 경매에 부쳐진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 모두를 있게 한 뿌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경까지 가게 만든 이해 당사자들을 탓하기에 앞서 그것이 오늘 우리의 적나라한 현재적 수준 그 자체임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 충무공은 그저 광화문 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는 과거의 존재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있게 한 현재적 뿌리다. 충무공이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다. 당연히 우리도 없었다.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숨졌다. 하지만 정작 충무공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온갖 무고와 선조 임금의 살기 어린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의 총탄은 차라리 역모의 굴욕을 피한 채, 장렬한 죽음을 가능케 한 역사 속의 소도구였을 뿐이다.

# 그렇게 온몸과 마음을 바쳐 조선을 지켜낸 충무공을 조선이 스스로 외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충무공 덕분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땅의 사람들이 그를 또다시 자괴감에 빠뜨리며 비장한 자결의 태세로 몰아가고 있다. 과연 이런 우리에게 충무공의 탄신일을 기념해 축제를 벌일 자격조차 있나 싶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와 혼조차 온전히 지켜낼 줄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 충무공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축제나 행사이기에 앞서 우리의 깨달음과 결행이리라. 단 12척의 배밖에 남지 않은 기막힌 현실 앞에서도 그 상황을 탓하지 않은 채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의 각오로 그가 싸웠듯이 우리도 그렇게 삶의 전장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한다면 충무공은 생가 터가 사라지고 현충사의 기와가 무너져 내린다 해도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자기 일신의 안위를 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홀연히 그는 갔다. 하지만 조선은 살아남았다.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충무공이 지켜낸 조선의 뿌리에서 나온 존재들이고, 그만큼 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이제 곧 닥칠 충무공 탄신일에 앞서 먼저 그 마음의 빚을 갚자. 각자의 위치에서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싸우겠노라 다짐하자. 그것만이 우리 마음에서조차 경매에 부쳐졌던 충무공의 혼이 깃든 생가 터를 다시 되찾는 길이다. 그래야 충무공을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됨도 물론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