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제도 문제점 심각…올 158건 신청,성사는 극소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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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근 대기업을 비롯한 부실기업들의 무더기 화의신청으로 사상초유의 '화의러시' 가 빚어지고 있으나 기업.채권단간의 협상난항 등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화의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화의신청 폭증 = 올들어 11월말 현재까지 전국 법원에 신청된 화의사건은 모두 1백58건으로 95, 96년의 13건, 9건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1~8월까지 38건이었던 데 비해 9~11월 사이에 1백20건이나 집중됐다.

서울지법의 경우 올해 모두 52건의 화의신청이 접수됐으나 개시 및 인가결정이 내려진 것은 모두 5건이다.

▶고금리가 화의 협상에 큰 걸림돌 = 이처럼 화의협상이 지지부진한 데는 화의신청 기업과 금융기관 등 채권단간의 채무상환협상이 금리문제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주요 이유로 꼽히고 있다.

화의신청 기업은 6~10%대의 금리를 제안하고 있는 데 비해 채권단은 최근의 고금리를 반영해 금리조건을 훨씬 높여줄 것을 요청해 입장이 엇갈리기 일쑤라는 것. 서울지법 민사합의50부 정준영 (鄭晙永) 판사는 "기업과 금융권이 서로 금리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이 지연되는 사례가 많다" 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난 24일 화의개시결정된 서울차륜공업의 경우 금융권에 6년거치 상환조건을 제시했으나 채권단의 반대로 2~3년으로 상환기간을 축소하고 금리도 1~2% 올려준 후 채권단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 9월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화의를 신청해 '화의러시' 의 불을 댕긴 진로그룹은 현재 법원의 재산보전처분결정을 받아 채무상환이 동결된 상태다.

이 회사관계자는 "최근 채권단들과 금리문제로 의견차이가 나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며 "채무규모가 2조5천억원에 달하는 데 우리가 제시한 9%대보다 높은 금리를 부담하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고 말했다.

또 10월 각각 화의를 신청한 쌍방울.뉴코아 등 덩치가 큰 기업들도 진로와 마찬가지로 주거래 은행 정도만 접촉할 뿐 사실상 협상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상태다.

▶화의악용 막을 대책 없다 = 그러나 법원관계자들은 "화의는 기업과 채권단이 서로 합의하는 것이 관건이고 법원이야 장소나 빌려주는 곳 아니냐" 며 최근 화의신청이 급증하는 데 반해 실효성있는 대책이 제대로 없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화의신청중인 대기업들은 한편으론 채무가 동결돼 있어 금융부담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경영을 할 수 있어 서둘러 협상을 완결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채무동결이 장기화할 경우 금융권뿐 아니라 물품대금 등 일반채권자들의 부담이 가중돼 또 다른 부실을 낳을 위험도 커진다.

이런 점에서 화의제도가 부실기업주의 경영권보호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또 한라제지.한라펄프, 만도기계 등 몇몇 화의신청 기업들은 외국회사와 기업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경영권보호와 채권동결이라는 최상의 조건에서 기업을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채권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지나치게 경영자에게만 이익을 주게 된다는 지적도 받는다.

또 화의기업을 사들인 외국기업이 당장 갚아야 할 채무를 몇년간 좋은 조건에 유예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는 것도 문제점이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문제들은 주로 대기업이 화의를 이용하는 데 따른 부작용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대기업은 채권단이 화의에 동의하지 않는 게 현실이어서 대기업의 화의는 사실상 봉쇄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채권단이 이같은 견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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