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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지조 지킨 정치인 밀턴 권력 잃었어도 도덕성 변함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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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존 밀턴(그림)이 만년에 실명 상태에서 ‘실낙원’을 집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밀턴이 청교도혁명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을 옹호한 열혈 혁명가요, 혁명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지낸 현실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죽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1660년 복귀함으로써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밀턴은 반역죄로 감옥살이를 했지만 새 정부의 관용정책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다. 그 뒤 밀턴은 자택에 은둔해 서사시 집필에 전념했다. 55세 때인 1663년 2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죽은 찰스 1세의 차남이자 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후에 제임스 2세)였다.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퉁명스럽게 밀턴의 실명이 혁명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천벌을 받아서 장님 신세가 된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이다. 밀턴은 녹내장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44세에 완전히 실명했다.

손님의 무례한 질문에 밀턴은 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실명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말씀대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으니까요.” 요컨대 밀턴은 “내가 장님 된 것이 천벌이라면, 당신 부친은 얼마나 큰 천벌을 받았기에 형장에서 목이 잘렸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권력 앞에 흔들림 없는 선비의 모습이다.

그 후 고위 관리가 국왕의 메시지를 갖고 찾아왔다. 밀턴에게 새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정부 입장에서 ‘악명 높은’ 밀턴을 전향시켜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밀턴이 과거에 했던 모든 주장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쾌거일 터였다. 그 무렵 밀턴의 처지는 궁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증권으로 갖고 있다가 왕정복고의 혼란 통에 대부분 날려버렸고, 부양해야 할 아내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게다가 늙은 장님 신세였다. 그러나 밀턴은 국왕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는 권력이나 금력에 굴복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덕성에선 역사의 후한 평가를 받을 거라고 장담했던 전직 대통령이 비리 혐의로 추락하고 있다.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부박(浮薄)한 자기 시대에 밀턴이 있어야겠다고 부르짖었지만, 우리 시대야말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킨 밀턴이 있어야겠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