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공황 시대의 인간심리…"공포기 거쳐 생활고 적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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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나라는 사상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경제 공황을 맞게 되었다.

경제공황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사안이지만 파산.소득감소.실업증대등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결국에는 행동과 사고방식의 패턴까지 바꾼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연관이 있다.

심리학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중에 '폴리아나' 현상이라는게 있다.

무섭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경우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우선 "어떻게 되겠지" 하고 바라는 안일한 심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IMF위기 초기 연일 주가가 폭락하고 달러가 폭등할 때 정부는 물론 일부 국민들조차 "잘 되겠지" 하는 안일한 심리상태에 빠져든 것도 이러한 경우다.

비단 우리만 그런게 아니다.

1929년 10월 뉴욕의 증시폭락으로 시작된 미국의 경제대공황 초기에도 이와 유사했다.

증권전문가들은 "기본구조가 견실한 만큼 가만두면 장세는 회복될 것" 이라며 낙관했고 투자가들은 이러한 말들을 믿고 싶어했다.

결과는 물론 정반대였다.

경제위기가 예상보다 오래 갈듯 싶으면 사람들은 '폴리아나' 단계를 너머 공포와 적응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오래된 실험이지만 쥐에게 항상 정해진 시각에 충분한 양의 먹이를 주면 쥐는 당장에 먹이를 먹어치운다.

그러다가 한동안 먹이를 불규칙하게 주어 자주 굶주리게 만들면 쥐는 받은 먹이를 다 먹지 않고 한구석에 모아 둔다.

최근의 경우를 보더라도 우선 돈을 은행에 맡긴 투자가들은 은행 금고가 바닥이 날지 모른다는 공포심리에서 맡긴 돈을 모조리 찾으려고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구매력 감소를 우려한 시민들은 라면.밀가루.소주에 이르기까지 무모한 사재기를 감행하기도 했으며 일부 언론은 '소비자 파산시대' 의 도래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소비자 파산시대에 진입하면 사람들의 씀씀이가 치밀해지고 분수에 맞게 사는 삶으로 적응할 공산이 크다.

인간의 경제행동이 경제상황에 의해 적응된다는 논리다.

우선 휘발유값이 오르자 서울의 교통소통이 원활해질 만큼 자가용차가 줄어든 것이나 해외여행이 급격히 감소한 것 등이 그 예라 하겠다.

한편 생활고가 극에 이르면 사람들은 적응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럴 때 일차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 대량실업과 그것이 몰고 올 자살 급증이다.

미국의 경우, 29년 증시폭락과 투자상실로 자살한 사람보다 그로부터 수년후 실업으로 자살한 수가 훨씬 많은데 우리는 아직 이런 사태를 경험하지 못했으나 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따라서 신임 대통령은 실직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큰 재정적 부담을 안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시민은 과격한 단체행동으로 나올 수 있다.

생활고가 개인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좌절감은 공격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심리학의 상식이다.

또한 생활고가 겹치면 정치적 극단주의, 전체주의가 고개를 들고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후퇴하기 쉽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앞서 실험에서 쥐가 저축을 하게 된 것은 저축강조주간을 두어서 된 것이 아니다.

실제상황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다.

사람은 남의 경험에서 배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제 위기가 우리에게 배울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차재호<서울대 심리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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