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 '잠못 이루는 세밑'…보너스 반납·무급휴가·감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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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기업 부장 朴모 (47.경기도성남시분당구이매동) 씨는 내년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의 입학금 걱정이 태산같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회사에서 전액 지급하던 자녀 학자금 지원이 끊긴 것은 물론 월급 삭감에 이어 연말 상여금마저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朴씨는 결국 생활비와 아들 학자금 마련을 위해 아내와 상의 끝에 매달 50만원씩 부어오던 노후복지 연금보험을 해약키로 했다.

내집장만을 위해 27평 아파트 조합주택 조합원으로 등록한 뒤 주택자금 5천여만원을 불입했던 회사원 鄭모 (32.서울송파구방이동) 씨도 회사측의 상여금 지급이 중단되고 대출도 어려워 중도금을 더 이상 넣기 어렵게 되자 조합주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鄭씨는 "아내와 부둥켜 안고 밤새 펑펑 울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회사 사정도 금방 좋아질 전망이 없어 내집마련의 꿈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 말했다.

IMF 한파가 정부와 기업을 넘어 본격적으로 서민 가계 (家計) 를 덮치고 있다.

예년 같으면 연말보너스와 신정연휴 휴가계획으로 들떠 있을 때지만 직장인들은 춥고 피말리는 겨울을 지내고 있다.

당장 임금이 깎이고 정기상여금이 지급되지 않아 '가계 부도' 의 위기에 몰릴 지경이다.

또 설상가상 (雪上加霜) 으로 기업의 강도 높은 자구책 때문에 무급휴직이나 의무휴가가 늘고 있는 가운데 언제 실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가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은행과 보험회사 창구에는 연말 가계비로 급전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예금과 보험을 해약하는 등 가계의 '강제구조조정'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X생명보험 강남지점의 경우 평소 해약건수가 한달 1백여건 5억~6억원선에 불과했으나 이달 들어서는 3배 이상인 3백60여건, 15억여원으로 크게 늘었다.

Y생명도 최근 고객들의 무더기 해약사태가 빚어지면서 자금사정이 악화되자 해약을 위해 찾아온 고객들에게 '며칠뒤 찾으러 오라' 며 대기표까지 발급하며 해약금 지급을 늦추고 있다.

또다른 보험회사의 경우 직원들의 상여금 지급을 위해 마련한 돈을 해약금 지급용으로 돌리고 있는 형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최근 회사측으로부터 무급휴가 통보를 받은 李모 (41) 씨는 "급여도 30%나 깎인데다 생각지도 못했던 연말상여금 지급중단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내년에도 작업 재개가 불투명해 손해를 감수하고 일단 보험을 해약했다" 고 말했다.

보험회사 金모 (32) 대리는 "최근 IMF 한파로 노후복지연금 등 저축성.금융형 상품의 해약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사정이 어렵긴 어려운 모양" 이라고 말했다.

정제원·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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