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holic] 심은경의 ‘붉은 물결’이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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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낮 12시. 한강 둔치 잠원지구에 캐슬린 스티븐스(55·한국이름 심은경·사진) 주한 미국대사가 나타났다. 머리엔 헬멧을 쓰고 자신의 손때 묻은 자전거를 탄 채였다. 빨간 티셔츠에 황토색 반바지를 입었다. 그의 주변엔 같은 빨간색 티셔츠 차림의 대사관 직원 10여 명이 자전거를 타고 속속 모여 들었다.

헬멧과 선글라스로 단장한 이들이 달릴 곳은 ‘하트 코스’. 한강~양재천~과천~안양천~한강으로 이어지는 70㎞ 길의 모양이 하트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직원들이 모두 모이자 스티븐스 대사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고향의 가족이 보내준 사슴고기 육포였다. “이걸 먹으면 힘이 솟을 겁니다.” 대사는 육포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지도에는 코스 모양을 따라 분홍색 형광펜으로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구간별 특징과 주의사항도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스티븐스 대사의 자전거 사랑은 유별나다. 출발에 앞서 인터뷰에 응한 그는 한국말로 “증거 있어요”라며 쇼핑백을 꺼내 보였다. 자전거를 타며 찍은 사진과 자전거 여행 지도가 가방에 가득했다. 그가 자전거 매니어가 된 건 1975년 충남 예산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2년간 활동하면서다. 그는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것은 아주 즐거운 추억”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은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달리면서 주민들을 만났다. 그때부터 자전거는 그에게 ‘소통’의 의미로 다가왔다. “자동차는 빠르고 편리하지만 나를 외부로부터 차단시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주위를 모두 둘러볼 수 있어 주변과의 소통이 가능하지요.”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오른쪽 맨 앞)가 18일 오후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에서 타미 오버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자전거 하이킹에 나서고 있다. [박종근 기자]


그의 자전거 사랑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됐다. 77년 국무부에 들어간 뒤 워싱턴 주변에 있는 알링턴 집에서 워싱턴 본부까지 11㎞를 자전거로 3년간 출퇴근했다. 내리막인 출근길과 오르막인 퇴근길을 운동 삼아 꾸준히 다녔다. 한번은 피츠버그에서 워싱턴까지 약 480㎞의 기찻길을 따라 자전거를 탄 적도 있다. 이 경험을 두고 그는 “기찻길이니 급경사가 없어 타기가 쉽고 강을 따라 가는 구간이 많아 경치가 기가 막혔다”고 기억했다.

그때부터 부임지마다 ‘자전거 전도사’를 자처했다. 가는 곳마다 자전거 클럽(동호회)을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하이킹을 떠났다. 30여 년 만에 찾은 한국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해 9월 부임한 후 어느 정도 업무가 손에 잡히자 대사관 내 자전거 매니어들을 찾아냈다. 이날 자전거 하이킹은 이들과의 첫 자전거 나들이다. 25일엔 ‘하이 서울 자전거 대행진’에 참여해 서울 시민들과의 ‘소통’에 나선다. 첫 자전거 하이킹의 경쾌한 페달을 밟으며 그가 한마디 했다. “25일 열리는 자전거 대행진을 통해 서울 시민들과 좋은 경치를 즐기며 함께 웃고 대화하고 싶습니다.”

김경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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