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분노와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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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라를 이꼴로 망친 게 누군데 우리더러만 고통을 분담하라는 겁니까. 솔직히 더이상 졸라맬 허리도 없어요.” 요즘 곳곳에서 들려오는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했는데 잘못했다,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하나 없고 뻔뻔하게 국민들의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행태가 괘씸하다는 얘기다.

나라를 살리겠다며 고사리손들이 1달러짜리 지폐를 모으고 주부들이 장롱속 금가락지를 내놓는 일은 눈물겹기 그지없다.

하지만 '높은 사람들' 이 나라살림 잘못 꾸린 결과를 애꿎은 서민들만 떠맡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국민정서를 누구보다 재빨리 간파한 대선후보들은 '청문회를 실시합네, 특별검사제를 도입합네' 하며 경제실정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누가 집권하든 현 정권은 책임을 면할 길이 없게 돼버린 형편이다.

그런데 과연 현 집권세력에 준엄히 책임만 묻고 나면 국민들의 마음이 눈녹듯 산뜻하게 풀릴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5년전 이처럼 경제를 들어먹을 사람들의 손에 나라살림을 맡긴 장본인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고향이 같아, 인상이 좋으니까…. 꼼꼼히 자질을 따져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대통령을 뽑아놓은 책임은 바로 유권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오랜 독재의 그늘 속에서 나라 지도자 한번 제 손으로 뽑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우리 국민들. 하지만 막상 어렵사리 얻은 소중한 권리를 학연과 지연, 혹은 돈 몇푼에 팔아넘기곤 했던 게 슬픈 현실이다.

이제 경제국치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야 우리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는 지당한 교훈을 배우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5년간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던 만큼 사흘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말아야 한다.

어떤 후보가 당선되는지가 향후 5년간 우리들의 밥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이 하나같이 닮은 꼴이라 '정책을 보고 고르라' 는 모범답안이 이번 선거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공약들마저 고성장과 저물가를 한꺼번에 외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사탕발림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뽑아야 할까. 적어도 인기에만 연연할 사람은 안된다는 게 많은 이들의 지적이다.

욕을 먹더라도 위기극복의 소방수 역할을 자청할 사람,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람을 고를 혜안이 절실하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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