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울 마음 없는 일본…동남아에 거액 몰려 '내코가 석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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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세계의 돈주머니' 라는 경제대국 일본은 한국의 경제위기에서 일단 한걸음 물러난 상황이다.

지난 7월 동남아 통화위기 당시 보였던 적극적 입장과 아주 딴판이다.

국제금융 관계자들은 한국이 일본의 협조융자금액 (1백억달러) 을 조기 지원받을 경우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조기 지원이 비관적이다.

미국은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직후 일본 대장성 핵심관료를 불러들여 양국간 지원에 쐐기를 박았다.

IMF프로그램 테두리 안에서만 지원하라는 요구였다.

일본 정부는 여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난달 28일 임창열 (林昌烈) 부총리의 방일 (訪日) 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의 방문은 태국.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지원다짐을 먼저 받아낸 뒤 IMF와 협상을 벌여 비교적 유리한 조건을 성사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林부총리가 협상에서 "일본의 주요 교역상대국인 한국이 흔들리면 일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며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자 일본 금융계.재계가 발끈했다.

역효과를 낸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그런 말은 실무진의 사전 조정을 거쳐 돈을 빌려주는 쪽 (일본)에서 했어야 할 말" 이라며 "한국이 먼저 꺼냈다면 예의가 아니다" 며 불쾌해 했다.

또 대일 외교와 관련한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거친 발언이나 독도 주변의 군사훈련 등으로 촉발된 일본 여론의 밑바닥에 깔린 염한 (廉韓) 분위기는 여전하다.

일본은 금융기관 연쇄부도 속에서 내년 4월 부실 금융기관을 대폭 정리하는 조기 시정조치의 실시를 앞두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다.

동남아에 거액을 물린 일본 금융기관들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국에 대한 대출한도를 축소하고 있다.

여기에다 야마이치 (山一) 증권이나 홋카이도 다쿠쇼쿠 (北海道 拓殖) 은행의 도산에서 보듯 대장성의 지시도 금융기관에 예전처럼 먹혀들지 않고 있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 정권도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에 따른 거액의 특융지원과 재정자금 투입으로 코너에 몰려있다.

그러나 상업차관 허용에 따라 한국의 대기업이 일본 금융기관이나 도요타자동차.소니 등 유동성이 풍부한 기업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대외신인도 제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 대기업 계열사를 외국 유력기업에 성공적으로 인수.합병시켜도 외국 투자가의 불안심리를 잠재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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