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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찍어 경제 살리겠다는 버냉키의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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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번 경제 위기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버냉키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금융 책임자로 등극했다. FRB 의장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폭넓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미 의회가 새 금융 규제안을 통과시키면 FRB의 권한은 더 막강해진다. 이 같은 권한 강화가 현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겠지만, 돈을 찍어서라도 유동성을 공급하려는 버냉키의 의지는 1980년대 초 이후 진정됐던 인플레이션의 악령을 되살릴 위험이 있다.

2006년 FRB 의장이 된 버냉키는 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의 통화 정책을 칭송했다. 미 경제가 순탄하게 성장하고, 노동 생산성이 제고된 것을 그린스펀의 공으로 돌렸다. 버냉키는 취임 초기 전임자의 정책을 본받아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꺼렸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심해지자 민간 시장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금융기관들에 대한 대출을 확대하며 개입을 본격화했다. 그린스펀의 노선과 결별한 첫 조치다. 최근 수개월 동안 버냉키는 FRB의 역할을 크게 확대했다. 우선 패니메이·프레디맥 등 국영 주택담보대출 기관들이 발행한 주식·채권을 매입하는 데 1조 달러(약 1300조원) 이상을 썼다. 대학생 학자금과 신용카드·자동차 대출 보증에도 1조 달러가량을 풀었다. 금융시장이 제 기능을 하도록 엄청난 돈을 푸는 것과 동시에 그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줄지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직접적 시장 개입을 자제한다는 FRB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버냉키는 FRB를 금융시장의 핵심 참여자로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금리를 낮추기 위해 금융시장에서 미국의 장기 국채를 사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즉 돈을 찍어 국채를 구입하겠다는 뜻이다. 역대 FRB 의장 중 최대의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돈을 찍어 미 경제를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면서도 장기적인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선진국 경제라면 이 시점에서 수천억 달러를 찍어내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론 높은 실업률로 대변되는 맥 빠진 경제가 기력을 차리게 만드는 선에 그칠 것이다. 실업률이 다시 낮아진 뒤에야 근로자들이 임금 상승을 요구하고, 뒤이어 기업들도 가격을 올린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가정엔 미국을 정상적인 선진국 경제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경제학자들은 과도하게 부풀어 있거나 반대로 위축돼 있는 금융시장, 부채가 많은 소비자, 투자를 줄여 현금을 확보하려는 기업을 신흥 시장의 특징으로 꼽는다. 신흥 시장엔 ‘맥 빠진 경제’라는 개념이 없다. 경제가 위축되거나 경제 성장률이 급격히 낮아지더라도 물가 상승률이 높을 수 있다. 만약 미국 경제가 신흥 시장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면 인플레이션이 쉽게 찾아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미국인들은 달러의 가치를 불신하게 돼 물건이나 외국 화폐를 사들이려 할 것이다. 미국의 천문학적 재정 적자도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높일 것이다. 1998년 러시아나 2001~2002년 아르헨티나에서처럼 화폐 가치가 폭락하며 물가가 폭등했던 전철을 밟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버냉키의 전략은 위태롭다. 그의 과감한 조치가 더 큰 위기를 막았는지는 시간이 밝혀줄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선 그가 최악의 도박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이먼 존슨 미 MIT 교수·경제학
정리=정재홍 기자, [워싱턴 포스트=본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