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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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기업들의 부도가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를 탓하거나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는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가 몰고온 좌절감과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위기 해결을 위한 강인한 노력과 단합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경제안정을 되찾고 외국인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첫단계로 우리는 극도로 침체된 지금의 분위기를 바꿔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건전한 소비생활은 때와 상관없이 미덕이고 사치품의 수입 자제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나친 소비 억제는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생산감소.실업증가를 통해 경기불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또 과소비를 자제하자는 노력도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요란한 방식이어선 안될 것이다.

앞에서는 개방을 약속하면서 돌아서서는 수입을 규제하는 이런 이중성이 많은 외국인들의 불신을 깊게 하지 않았는가.

둘째로 기업이든, 개인이든 모두 금융기관을 믿고 예금인출을 자제해야 한다.

정부는 2000년말까지 3년간 모든 예금의 원리금 전액에 대한 지급보장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도 만일 예금자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무차별적으로 예금을 인출하면 도산하지 않아도 될 금융기관마저 도산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현 금융시장 불안과 기업도산의 진원지가 돼 있는 부실 종금사에 대한 지원 혹은 정리방안을 조속히 확정.시행해야 한다.

우선 당장은 종금사의 자금차입에 대한 정부보증이나 부실채권 조기정리 등을 통해 종금사 자금사정을 개선해줘야 한다.

그러나 종금사를 포함해 부실한 금융기관은 모두 조속한 시일내에 합병하든, 통폐합하든 정리하지 않는 한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넷째로 벌써부터 심각한 신용경색과 20%를 넘는 고금리로 인해 충분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유망업체들이 아예 기업을 포기하고 있는가 하면 조금만 더 참으면 투자의 결실을 볼 기업들마저 무더기로 쓰러져가고 있다.

이처럼 기업인들이 자신을 잃고 사업의욕을 상실하다보면 우리 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다.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으려면 옥석 (玉石) 을 가려 살릴 기업은 살리고 정리할 기업은 정리하는 어려운 작업을 누군가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금융기관들은 그들 자신이 이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형편이어서 기업을 걱정할 여유가 없다.

또 금융시장도 기업어음시장이 마비되는 등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정부.감독기관.금융기관, 그리고 경영진단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는 한시적인 기구를 설립해 지원기준을 설정하고 대상기업을 가려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기업에 대해서는 추가적 자금지원.부채상환기간 연장.주식전환 등의 방법을 통해 기업살리기 작업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경제의 구조조정은 누가 하라고 강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중소기업.대기업.재벌, 그리고 금융기관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투자를 조정하고 조직과 인력을 정비하며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더이상 도와줄 힘도, 재원도 없다.

이번 IMF 구조조정을 계기로 우리 힘으로 우리 경제와 사회를 고쳐나갈 수 있는 능력과 결의를 외국사회에 보여줘 외부의 압력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불명예를 씻어버려야 할 것이다.

특히 재벌기업들은 말만 하지 말고 어떻게 투자사업을 재조정하고 재무관리를 투명하게 해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밝히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외국인들의 한국경제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구조조정을 하든, 제도개편을 하든 이제부터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공개해 일말의 의구심도 갖지 않도록 투명성을 약속해야 할 것이다.

IMF의 지원금융마저 받는 처지에 더이상 감출 것이 무엇이 있고, 우리끼리 적당히 이리 맞추고 저리 끼운다고 해서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외국인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집중돼 있다.

다시는 외국인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도록 우리의 성실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박영철<고려대 경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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