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엔 돈 필요” 현실적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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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은 부자나 샘이 깊은 후원자가 있는 복 많은 정치인만 정치를 하는 나라가 잘되겠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달 4일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올린 ‘정치하지 마라’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샘 깊은 후원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게 의지하다가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도덕성’을 최대 무기로 대통령이 됐던 사람이 측근 기업인들과의 ‘부패의 고리’에 얽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은 일찍부터 “현실 정치에 돈은 필요하다”며 ‘정치와 돈’의 관계에 대해 현실적인 인식을 보였다. 2001년 12월 말 당시 민주당의 대선 경선 주자였던 노무현 고문이 출입기자들에게 ‘2000년 16대 총선에서 돈선거를 했다’고 자인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일도 있었다.

문제가 된 발언은 “지난번 부산 선거에서 컴퓨터에 유권자별로 ‘○·×’ 표시를 해가면서 원도, 한도 없이 맘껏 써봤다”는 말이었다. 당시는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해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듬해 4월 당내 경선과정에서 불거져 논란이 됐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그는 뇌물·매표행위와 같은 뚜렷한 불법만 아니라면 정치자금 사용과 모금에 제한을 풀겠다는 소신을 거듭 밝혔다.

2003년 4월 대통령으로서 국회에서 한 첫 국정연설 주제 중 하나도 정치자금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현역 의원이나 지구당 위원장이 아닌 정치 신인도 후원금을 모아 정치에 입문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정치자금’을 상황에 따라 달리 쓰는 정치적 무기로 활용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이던 2003년 말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등 4당 대표와 회동에서 “우리가 쓴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 은퇴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쓴 시점이었다. 반면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자기 측근들이 구속된 데 대해선 “우리가 그동안 익숙해 왔던 선거제도·선거문화가 만들어낸 희생자”라고 변명했다. 형 노건평씨에게 인사 청탁을 했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두고 “좋은 학교 나오시고 성공한 분들이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남 사장이 한강에 투신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중앙대 장훈(정치학) 교수는 “평등과 형평 등 진보적 이념을 내세웠던 노 전 대통령이 정치자금은 자유주의적 입장을 보여 모순된다”며 “상황에 따른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임기응변적 발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낡은 정치 청산’을 슬로건으로 당선됐던 노 전 대통령도 정치자금만은 낡은 정치에 머물러 있었다”며 “정치자금 제도에 대한 객관적인 반성과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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