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선 공약점검]3당 경제난 긴급대책 비교·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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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27일 '긴급명령으로 기업의 부채상환을 유예해줘야 한다' 는 재계의 주장은 정치권과 행정부를 벌집 쑤신듯 만들었다.

다음날 3당이 정부에 이를 수용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달궈진 냄비위에서 톡톡 튀는 소금' 꼴인 이들의 '요구' 를 정부는 물론 거부했다.

경제긴급대책을 둘러싼 마찰로 정국과 경제정책이 표류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실망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응을 보였지만 각 후보의 위기관리 능력과 경제정책관, 즉 '어떤 경제대통령의 모습일 것인가' 를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돼 유권자로서는 얻은 것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 부채상환 유예 = 세 후보는 '모두 부채상환 유예가 필요하고 이것 때문에 금융기관에 돈이 달리면 한국은행이 특융으로 지원해줘야 한다' 는데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세 후보는 조치의 강도면에서부터 약간씩 다른 목소리를 냈다.

한나라당과 국민회의는 긴급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국민신당은 정부.금융기관들이 협의해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상환유예의 대상에 대해 '기업' 이라는 표현으로 가장 포괄적인 해석이 가능토록 한 것은 한나라당이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은 '건전 기업' 이라고 하고, 특히 국민신당은 중소기업을 강조해 대상기업을 좁혔다.

유예기간에 관해서도 가장 모호한 것이 한나라당이다.

'한시적' 이라고만 했다.

국민회의는 6개월, 국민신당은 1년동안 부채상환을 유예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아무리 대선이 가까워져 재계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해도 너무 심하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72년 사채동결 조치나 수년전 '2년간 임대료 동결' 을 주장해 순식간에 임대료 인상파동이 일어났던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위험하기까지 한 아이디어를 대정부 '정책요구' 라는 포장으로 내놓을 수 있는 후보들의 강심장에 놀라울 뿐이라고 경제학자들은 비판했다.

'시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장을 없애라' 는 생각들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들 말대로 하면 금융시스템이 곧 마비된다.

경제가 곧 서버리고 만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국제통화기금 (IMF) 뿐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던 외국투자자들이 "한국은 시장경제를 포기했다" 며 다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꿔준 돈을 되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금융기관이 유예조치가 떨어지기 전에 한푼이라도 대출을 더 빨리 회수하려 할 것은 당연한 이치고, 그러면 멀쩡한 기업까지 부도가 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은행 특융도 마찬가지다.

정부돈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해 주는 것부터 국민부담을 늘리는 것이고, 오히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한 조치다.

안그래도 IMF의 요구에 의해 통화긴축과 금융기관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조치다.

◇ 금융실명제 보완.유보 = 무기명 장기채권을 발행해 '장롱속의 돈' 인지 '검은 돈' 인지를 산업자금화해야 한다는 것에서도 각 정당은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 보완조치에 관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과 국민신당은 실명제 보완입법을 주장하고 있고, 국민회의는 "우리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고 현상파악을 한 후 "실명제를 즉각 유보해야 한다" 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회의는 지난 며칠간의 'IMF구제금융을 받는 기간 실명제를 유보해야 한다' 는 주장에서 더 다급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에 관해 '실명제가 금융.외환 위기의 주범인가' '실명제를 유보하면 얼마나 많은 돈이 산업자금화할 것인가' 등 실명제 유보의 효과에 대해서는 재계.정치권과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남아있다는 점만 지적한다.

더 이상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 기타 대책 = 긴급대책의 '긴급성' 면에서 각 당이 확실히 차별화되는 것은 대출상환 유예.실명제보완 이외의 여타 대책에서다.

그래도 한나라당의 '부실채권 정리기금 대폭 확충' , 국민회의의 '기금 20조원으로 확대' 는 좀 나은 편이다.

부실 금융기관의 문제해결에 늘어나는 국민의 부담이나 인플레 압력등에 관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심각해진다.

'증시를 당분간 휴장해야 한다' '6개월간 해고를 중지하고, 모든 산업에서 임금을 동결해야 한다' 는 국민회의의 주장은 위기에 대처하려는 모습이긴 하나 평소 자처하던 '자율 시장경제의 신봉자'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제일 정신을 덜 잃고 있는 정당은 국민신당이다.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해야 한다는 정론을 견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각 정당이 내놓은 긴급대책으로 미뤄볼때 '경제대통령' 으로서의 후보들의 기본적 자질과 철학, 나아가 그 주변 '경제전문가' 들의 위기관리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하겠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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