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아버지께 못다쓴 편지 담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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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모습과 말하는 것은 닮은 꼴이지만 아버지의 재능, 부지런함, 명민함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저는/ 아버지가 하신 일, 아버지가 하시고 싶으셨던 일까지 모두 닮고 싶어/ 아버지가 보셨던 것과 똑같은 강, 똑같은 하늘, 똑같은 길을 보며/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한국 영문학계의 태두인 고(故) 장왕록 박사(1924~94)를 기리며 그의 딸 장영희(52)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하늘나라로 띄운 편지다. 편지 내용처럼 영문학자로, 교수로, 번역가로, 수필가로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고 있는 그는 장 박사의 10주기를 기념해 30일 출간되는 유고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샘터사)에 이 편지를 실었다.

"저희 형제(1남5녀) 중 네명이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어쩌다보니 제가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됐어요.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미처 마치지 못하신 번역(펄 벅의 '살아있는 갈대')과 중.고 교과서 작업도 제가 마무리했지요."

죽음과 삶을 초월한 공동 번역으로 큰 화제가 됐던 '살아있는 갈대'와 달리, '고인이라 안 된다'는 당국의 반대로 공동 집필한 교과서에 아버지 이름을 저자로 올리지 못했던 게 장 교수에겐 두고두고 한이 됐다. 이번에 그가 장 박사의 수필 26편을 묶어 유고집을 낸 것도 '5년, 10년 뒤에라도 아버지의 이름을 보란 듯이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던 그때 다짐의 소산이다.

"생전에 늘 속만 썩였는데 돌아가신 후에라도 '자식 덕'을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장애인(장 교수는 돌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불편하다)인 저를 정상인과 똑같이 교육시키기 위해 아버지가 기울인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을 거예요."

장애인의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호소한 아버지 덕분에 장 교수는 서울사대부중.고를 거쳐 서강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미국 뉴욕주립대(올바니)에서 박사를 마친 뒤 94년부터 모교인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지금도 '장왕록 교수의 딸'로 저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후광이 짐스럽기는커녕 저에겐 큰 기쁨입니다. 생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인'스칼렛'을 공동 번역했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 딸은 스칼렛 같은 아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극복해낸다'고 하신 적이 있거든요. 아버지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은이와 엮은이로 부녀의 이름이 다시 한번 사이좋게 함께 한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의 출판기념회는 30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동문회관 2층에서 열린다.

글=신예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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