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내탓" 일본 사장,"네탓" 한국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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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 야마이치 (山一) 증권이 25일 신청한 자주폐업 (自主廢業) 은 한마디로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것이었다.

인수.합병이 아니어서 7천3백여명의 임직원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퇴직금도 깎이고 재취업 때까지 실업수당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살인적인 물가의 일본에서…. 24일 도쿄 (東京) 증권거래소 기자회견장.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야마이치증권의 노자와 쇼헤이 (野澤正平) 사장 눈가에는 눈물이 어렸다.

"2천7백억엔의 손실은 내가 지시해서 은폐시켰습니다." 그러고는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제가 죄인입니다.사원들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제발 그들을 살려주십시오. " 불과 두달 전 총회꾼 사건의 여파로 9명의 선배를 제치고 상무에서 곧바로 사장에 발탁됐던 노자와. 야마이치의 손실 은폐사건이 3년 전부터 시작된 구조적 범죄라고 밝혀진 마당에 그는 사실 억울했다.

전임 사장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장 (敗將) 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검찰 수사와 형사처벌이 불가피해졌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이상 경제 긴축에 따른 한계기업의 연쇄부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도 국제적 상식에 맞게 부실기업을 정리해야 한다.

엄청난 부실 늪에 빠지고도 "은행이 돈을 더 빌려주지 않아 부도가 났다" 며 태연히 책임을 전가했던 한보그룹의 정태수 (鄭泰守) 총회장. "내가 아니면 누구도 기아자동차를 못 살린다" 며 버티기 작전으로 국가경제를 골병들게 했던 김선홍 (金善弘) 회장. 금융 당국자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보를 틀어쥔 채 "우리는 동남아와 다르다" 며 끝까지 국민을 속인 재정경제원과 한은. 그들은 위기에 빠진 경제를 내팽개치고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국회로 몰려다녔다.

정책 실패에 따른 고통은 마지막엔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은 검찰.국세청을 동원해 정책 담당자와 최고 경영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이제 부도까지 가기 전, 힘이 남아 있을 때 인수.합병이라도 단행해 최소한 실업자의 대량 발생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야마이치의 노자와처럼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는 용기라도 있든지 말이다.

이철호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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