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이형기 병마딛고 시혼 과시…'격렬한 사라짐'의 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원로시인 이형기씨 (李炯基.64)가 병마를 딛고 일어나 의지의 시혼을 과시하고 있다.

1949년 '문예' 지를 통해 16세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등단, 천재시인으로 불리던 이씨는 시집과 평론집등 20여권을 펴내다 지난 94년 뇌졸증으로 쓰러져 3년여간 병상에 누워있어 문단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 이씨가 올 여름 회복돼 한결 엄결한 시세계를 의욕적으로 펼치며 후배시인들에게 귀감을 보이고 있다.

"대밭에 쭉쭉 대가 솟아있다/날카롭게 일직선으로 위로만 뻗는 키/곧은 마디 마디//…//다시 보면 여름에도 차가운 감촉/군살 하나 없이 온몸으로/팽팽한 긴장감이 하늘에 닿아 있다//…//깨뜨려도 부서지지 않고/대쪽이 되는 대//꽃은 피우지 않는다/꽃 피면 죽는 개화병/격렬한 사라짐이 있을 뿐이다."

최근 출간된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신작시 5편중 '대' 다.

일찍이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낙화' 로 사라짐의 존재론적.사회학적 미학의 한 정점을 보여주었던 이씨가 이 시에서는 '격렬한 사라짐' 의 미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전의 시에서 보였던 전통적 정서나 모던한 기법을 모두 버리고 '군살 하나 없이 온몸으로 팽팽한 긴장감' 으로 본질 직관을 향해 시가 쏜살 같이 날아가고 있다.

"…엊그제까지의 모습은 허상/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갖고/이제야말로 원형으로 돌아온 당신/촉루 (觸루) 라는 이름은 좀 어렵다/알기 쉽게 해골박/누구나 이렇게 해골박이 될 것을/그 눈으로/아니 눈 있던 자리에 뻥 뚫린/바람이 씽씽 통하는 구멍으로/당신은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같이 발표한 '원형의 눈' 일부다.

언어로 조작된 모든 허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사물의 원형, 그 본질을 들여다보겠다는 시적 의지가 사경을 헤메던 시인을 구했을 것이고 한국시의 깊이를 더할 것이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