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김원룡교수 4주기에 제자들 보고서 봉정…후학들의 '진정한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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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20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서울은 방이동.가락동 등 잠실벌 개발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었다.

강 건너 용마산과 아차산 줄기의 끝인 구의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발은 이미 정해진 것. 77년 이 일대 구릉유적에 대한 구제 (救濟) 발굴이 시작됐다.

쫓기듯 2개월여만에 완료한 발굴조사 결과 조사단장을 맡은 한국 고고학의 태두 고 (故) 삼불 (三佛) 김원룡 (金元龍) 선생은 "혹시 소요새 (小要塞) 같은 중요시설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백제고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0년이 흘러 지난 14일.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에서는 삼불선생 4주기 추모식과 함께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 라는 구의동유적 발굴조사 종합보고서가 봉정됐다.

'백제고분' 이 아닌 '고구려 요새' 였다.

조심스런 일이었다.

스승의 허물을 들추는 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행위원장을 맡은 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스승의 잘못을 밝혀내는 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며 진정한 고고학의 발전을 위한 길임을 강조했다.

한국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장골처 (藏骨處) 인가 산골처 (散骨處) 인가, 석굴암 본존불이 석가여래인가 아미타여래인가, 국보 78.83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은 어디인가 등은 아직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의동보고서에 담긴 '후학들의 용기' 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일부에는 아직도 곱지 않은 시선이 남아 있다.

구의동 유물들을 연구해 이번 보고서의 촉매역을 담당한 서울대 박물관 최종택 학예연구사는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일에 왜 앞장섰느냐" 는 질책으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선대 학자들의 연구는 그 시대의 학문수준에서 충실히 이뤄진 것으로 오늘날 학문의 토대가 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학설이 학문의 발전과정에서 후학들에 의해 뒤바뀌게 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 삼불선생 4주기 추모식에 우연히 참석한 러시아사회과학원의 메드베데프 주임연구원의 말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곽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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